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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파업으로 장애아 된 박군 가족 4년 만에 재판에서 승소

글·강지남 기자 / 사진·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5. 10. 10

2000년 박군 부모는 당시 세 살이던 박군이 갑자기 토하기 시작하자 병원을 찾았지만, 병원파업 탓에 제때 응급수술을 받지 못해 아이가 장애아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2001년 10월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5억5천만원의 배상 판결을 받아낸 박군 가족의 지난 사연.

병원파업으로 장애아 된 박군 가족 4년 만에 재판에서 승소

병원파업으로 피해를 입은 환자에 대한 병원의 책임을 묻는 첫 판결이 나와 화제다. 지난 8월 말 대구지법 제11민사부(재판장 이영희)는 2000년 병원파업으로 응급수술을 제때 받지 못해 장애아가 된 박모군(7)과 그의 가족이 경북 포항의 S병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병원 측은 이들 가족에게 5억5천만원을 지급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지난 2000년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전국적으로 벌어진 병원파업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병원에 있어야 할 의사들이 거리로 뛰쳐나가는 바람에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병세가 악화됐다거나 심지어는 사망에 이르렀다는 어처구니없는 뉴스들이 잇따랐다. 이번 판결은 파업을 이유로 환자들을 나 몰라라한 병원에 배상책임을 물은 첫 번째 판례이기에 그 의미가 크다.
박군의 변호를 맡은 ‘법무법인 한강’의 홍영균 수석변호사는 “재판부는 그동안 의료소송에서 통상적으로 병원 측의 과실책임을 20∼70% 정도 인정해왔지만 이번 재판에서는 이례적으로 80%의 과실책임을 인정했다”면서 “병원파업으로 환자에게 피해를 입힌 병원 측에 엄중한 법적·윤리적 책임을 물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S병원 측이 전국적인 의약분업 사태 때문에 소속 의사들이 파업을 하고 대체 의료진도 구할 수 없어 수술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병원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을뿐더러 이 같은 사정이 인정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유만으로 면책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2000년 10월8일 당시 생후 2년 7개월이던 박군은 새벽부터 여러 차례 토하기 시작해 같은 날 정오 무렵 S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당시 응급실은 전국적인 병원파업으로 단 한 명의 소아과 전문의만 근무하고 있는 상황. 의료진이 턱없이 부족해 치료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는 사이 박군은 계속 토하고 입술에 청색증이 나타나는 등 상태가 악화되어 갔다. 오후 5시경 전문의는 X레이 판독 결과 장폐쇄(막힌 장의 부위에 혈액순환이 차단되거나 저해되어 장의 괴사가 일어난 상태)일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지만 의료진이 없어 박군을 치료하지 못했다. 결국 박군은 S병원 응급실에 머문 6시간 동안 별다른 응급치료를 받지 못한 채 오후 6시경 2시간 거리인 K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응급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후송할 때는 응급차에 응급구조기사가 동승해야 하고 옮겨가는 병원에 미리 환자의 상태를 전화로 알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후송 도중 벌어질지도 모르는 비상사태에 대처하고 병원도 미리 응급환자를 맞을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S병원은 박군의 의무기록만 보냈을 뿐 응급구조기사가 동승하지도, 미리 전화를 걸어놓지도 않았습니다. 2시간 만에 K병원에 도착했을 때 박군은 이미 탈진 상태였어요.”
기가 막힌 일은 K병원에서도 일어났다. K병원의 의사는 S병원의 장폐쇄 진단을 무시하고 뇌 질환을 의심해 박군의 머리를 CT 촬영한 것. 그러는 사이 박군은 하루를 넘긴 새벽 1시경 경련 발작을 일으켰고 맥박이 뛰지 않아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뇌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이 확인된 후에야 K병원 의료진은 복부 CT 촬영을 실시했고 오후 4시 복막염과 감돈성 장폐쇄로 결론 내리고 개복수술에 돌입했다. 건강하던 아이가 갑자기 구토를 시작해 병원을 찾은 지 28시간 만에, S병원 전문의의 장폐쇄 소견이 나온 지 23시간 만에 이뤄진 때늦은 수술이었다.

때를 놓친 수술로 3∼4세의 인지행동능력 보이고 장애 2급 판정 받아
수술은 잘되었지만 박군은 지체된 수술로 인해 큰 후유증을 겪고 있다. 심장이 일시 정지해 뇌에 산소가 공급되지 않아 여러 증세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박군은 수술 후 의식이 흐려지고 간헐적인 발작 증세를 보이다 신체 오른쪽 마비와 간질, 언어장애, 정신지체 등의 증세를 보여 4년 전 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대학강사였던 박군의 엄마는 직장을 그만두고 박군을 돌보는 데만 온 힘을 쏟고 있다. 올해 일곱살인 박군은 후유증으로 인해 3∼4세 수준의 인지행동능력을 보이고 있는데, 세 살 터울인 동생보다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일 때 부모로서 가장 마음이 아프다고 한다.

병원파업으로 장애아 된 박군 가족 4년 만에 재판에서 승소

“그 일이 있기 전에는 건강한 아이였어요. 자주 배가 아프다고 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날 음식을 잘못 먹지도 않았어요. 감돈성 장폐쇄라는 게 원래 그렇게 느닷없이 오는 거라고 하더군요.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일반학교에 보낼 계획이에요. 일단은 정상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게 하고 싶어요.”
통상적으로 의료소송은 일반 재판보다 판결이 나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린다. 계약서나 수사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서로의 책임에 대해 공방을 벌여야 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에게 진료기록 감정과 사실조회 등을 받아야 하기 때문. 박군의 사건이 1심 판결을 받는 데 4년 가까이 걸린 까닭도 이 때문이다. 보통 세 차례 정도면 판결이 나오는 일반 재판들과 달리 박군 사건은 10회의 재판이 열렸고, 그때마다 박군의 엄마는 꼬박꼬박 재판에 참석했다고 한다. 한편 지난 6월 K병원은 박군을 뒤늦게 수술한 점을 인정, 법원이 제시한 조정금액 1억5천만원에 합의했으며 S병원은 1심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한 상태다.
박군 측 변호인인 홍영균 변호사는 “당시 S병원 응급실에서 혼자 근무한 전문의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파업만 아니었다면 응급 개복수술을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박군이 이 같은 후유증을 갖게 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증언했다”며 “이번 판결을 계기로 아무리 파업 중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응급실에는 대체 의료진을 갖춰놓아야 한다는 것을 종합병원들이 인식, 대응자세가 바뀌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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