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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책을 펴는 즐거움

호랑이와 함께 태평양을 건넌 인도 소년의 생존기 ‘파이 이야기’

기획·김동희 / 글·민지일‘문화 에세이스트’ / 그림·이두식‘서양화가’

2005. 10. 07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는 인도인 가족이 탄 화물선이 태평양 한가운데서 침몰한다. 열여섯 살 소년 파이는 간신히 구명보트에 오르지만 거기엔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 벵골호랑이가 자리 잡고 있다. 가족을 한순간에 잃고, 언제 자기를 해칠지 모르는 호랑이와 공존 아닌 공존을 하면서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는 소년의 모습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호랑이와 함께 태평양을 건넌 인도 소년의 생존기 ‘파이 이야기’

아무리 뛰어난 이야기꾼도 “재미없다”는 말 한마디면 입을 다문다. 어떤 훌륭한 소설책도 재미가 없으면 이미 반 이상 죽은 거나 다름없다. 한마디로 재미는 이야기의 생명이다. 읽다 말고 던져버리는 책 신세를 면하려 우리의 소설가 이야기꾼들은 참으로 피나는 노력을 한다. 새롭고 놀라운 소재를 찾느라 머리를 싸매고,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풀기 위해 하얗게 밤을 새운다.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는 불꽃을 만드는 것도 그의 몫이다.
‘파이 이야기’를 쓴 얀 마텔은 능청스럽게 독자의 혼을 빼는 이야기꾼이다. 책머리 작가 노트에서부터 그는 자기 이야기에 자신감을 보인다. 결말이나 다름없는 주인공의 생존 ─ 태평양 한가운데서 난파돼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에 올라탄 소년의 미래 ─ 을 미리 공표해버린다. 그걸 알더라도 지루하지 않게 이야기를 끌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구상했던 다른 작품 대신 파이 이야기를 쓴 이유를 들며, 은근히 이 이야기엔 생명의 불꽃이 작열하고 온갖 감정 또한 살아 있음을 내세운다. 사실 그렇다.

탁월한 이야기꾼의 솜씨로 들려주는 소년과 호랑이의 공생기
파이는 16세 인도 소년이다. 무대는 태평양 한가운데.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다 배가 난파돼 혼자 살았다. 혼자라는 건 사람만 그렇다는 것이고 몇 뼘 안되는 구명보트에는 벵골호랑이, 하이에나, 오랑우탄, 얼룩말이 함께 탔다. 하이에나가 얼룩말,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먹었다. 배 한쪽엔 호랑이, 밑에선 상어 떼가 휘젓고 폭풍우는 걸핏하면 보트를 흔든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요, 황당한 처지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파이는 2백27일을 견디고 육지에 발을 디딘다. 희망과 절망, 삶과 죽음, 인생과 신, 자연과 생명과 고통이 작품 속에서 어우러지고 독자에게 그 이상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소설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파이의 어린 시절. 그의 본명은 ‘피신 몰리토 파텔’이다. 프랑스어로 수영장이라는 뜻의 피신(piscin)이 피싱(pissing· 소변보다)으로 발음돼 놀림감이 되자 그는 과감히 자기를 파이 파텔로 불러달라고 선언한다. 원주율(원주와 그 직경과의 비) 파이(π)를 선택한 이유는 밝히지 않지만 그걸 유추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어쨌거나 파이는 주어진 환경(이름)이 싫으면 스스로 타개하는 성품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 그는 또 신을 사랑한다. 힌두교인이면서 기독교를 믿고 이슬람식 기도를 한다.
“힌두교인이면서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가 될 수는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호랑이와 함께 태평양을 건넌 인도 소년의 생존기 ‘파이 이야기’

‘잔칫날’ 이두식 작. 캔버스에 아크릴릭. 강렬한 색채와 분방한 필치로 삶의 환희와 존재의 치열함을 그려냈다.


“간디는 ‘모든 종교는 진실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신을 사랑하고 싶을 뿐이에요.”
2부는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 태평양에서 난파돼 3년산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함께 구명보트에서 보낸 2백27일의 기록이다. 역경을 헤쳐나가는 파이의 용기와 지혜, 믿음이 돋보이고 자연(바다)의 경이로움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파이는 호랑이를 길들인다. 호랑이에게 언제든 잡아먹힐 수 있다는 공포감을 우선 극복해야 한다. 좁은 보트 안이지만 자신의 영역과 호랑이의 영역이 다름을 주지시킨다. 고기를 잡으면 먼저 호랑이에게 준다. 말 그대로 한배에 탔으니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터였다. 사실 호랑이가 없다면 파이는 절망을 안은 채 혼자 남겨질 것이고 절망은 호랑이보다 훨씬 무서운 존재가 아닌가. 그는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호랑이 리처드 파커에게 쏟았다. 기도하며 생존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은 망각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다.
“조난자가 되는 것은 계속 원의 중심점이 되는 것과 같다. 아무리 많은 것이 변하는 것 같아도-바다가 속삭임에서 분노로 변하고 하늘이 칠흑같이 까맣게 변해도-원의 중심점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의 시선은 언제나 반지름이다. 원주는 대단히 크다. 조난자가 되는 것은 춤추듯 겹쳐지는 원들 사이에 붙들리는 것이다. 당신은 한 원의 중심이며 당신 위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원이 휘휘 돌아간다. 그건 태양과 바다다.”


공포와 고통, 절망을 동반하지만 지혜와 믿음으로 헤쳐나가는 삶
이젠 왜 피신이 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우리는 이해하게 되었다. 바다와 태양, 어쩌면 인생이라는 원 둘레에선 우리는 어디에 서 있건 원의 중심점이며 시선은 반지름에 머문다. 호랑이 같은 뜻하지 않은 불행이나 고난도 따지고 보면 우리와 함께 원 중심에 선 동반자일 수밖에 없다.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암 환자들이 암과 더불어 사는 삶을 체득하듯 인생은 공포와 고통과 절망을 함께 동반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파이, 원주율이 항상 3.14로 일정하듯이 우리가 사는 삶은 남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사실은-어쩌면 신의 눈에서 보자면-결국은 같다는 이야기일 터다. 파이의 고난은 우리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지혜와 용기, 믿음으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2부는 강조하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 3부는 살아 돌아온 파이의 행적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이야기다. 파이가 탔던 배의 침몰 원인을 밝히려 찾아온 조사관들과 파이의 대화록이다. 그들은 파이의 이야기를 전혀 믿지 않는다.
“파텔, 호랑이는 말로 다 못할 위험한 야생동물이에요. 호랑이와 구명보트에서 어떻게 같이 살았지요? 그건…”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죠. 안 그래요? 그리고 뭔가를 이해한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를 갖다 붙이지요. 아닌가요? 그게 인생을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요?”…
…“두 분이 원하는 게 뭔지 알아요. 놀라지 않을 이야기를 기대하겠죠. 이미 아는 바를 확인시켜줄 이야기를 말이에요. 더 높거나 더 멀리, 다르게 보이지 않는 그런 이야기. 당신들은 무덤덤한 이야기를 기다리는 거예요. 붙박이장 같은 이야기. 메마르고 부풀리지 않은 사실적인 이야기.”
이 타고난 이야기꾼의 능력은 끝까지 우리를 저버리지 않는다. 책장을 덮기 아쉬워 다시 책머리의 작가노트를 들여다보면 파이 이야기가 실화냐 아니냐는 의문을 갖는 것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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