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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감동 인생

사지마비 장애 극복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수석 레지던트 된 이승복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병원에서 또 다른 꿈을 발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글·송화선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황금나침반 제공

2005. 10. 05

KBS 휴먼 다큐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통해 신체장애를 극복한 감동적인 사연이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은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레지던트 이승복씨. 지난 9월 초 한국을 방문한 이씨를 만나 끔찍한 장애의 고통을 딛고 지금의 자리에 서기까지 남다른 사연을 들어보았다.

사지마비 장애 극복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수석 레지던트 된 이승복

사지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레지던트가 된 이승복씨(40)는 ‘슈퍼맨’이라는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지난 6월 방영된 KBS 휴먼 다큐 프로그램 ‘인간극장’의 ‘슈퍼맨 닥터 리’ 편을 통해 그의 남다른 삶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졌기 때문.
이씨는 73년 여덟 살 때 부모를 따라 미국 이민을 떠난 뒤 전미 체조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만큼 촉망받는 체조선수로 활동하다 83년 연습 도중 일어난 사고로 사지마비 장애인이 됐다. 하지만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장애를 극복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다트머스 의대, 하버드 의대 인턴십을 거쳐 존스홉킨스 병원 수석 레지던트가 돼 관심을 모았다. 그가 ‘슈퍼맨’이라는 별명을 얻은 건 강한 의지와 입지전적인 성공담으로 많은 이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9월 초 서울의 한 호텔에서 그를 직접 만났을 때 처음 받은 인상은 ‘슈퍼맨’이라는 별명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웃으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선한 눈매와 고통스런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물을 글썽이는 여린 감성을 갖고 있는 ‘보통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저 ‘순둥이’ 같은 모습 어디쯤에 혹독한 장애를 이겨내게 한 집념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질 무렵,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슈퍼맨’이라는 별명 때문에 저를 특별한 사람으로 보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 전 남들보다 좀 더 많이 노력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제가 TV에 출연하고 자서전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를 쓴 건, 인생에서 좌절을 겪은 분들에게 ‘아, 저 사람도 하는 걸 보면 나도 다시 일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감과 용기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이씨의 사연은 미국 AP통신과 뉴욕타임스, 폭스 TV 뉴스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큰 반향을 일으켰고, 우리나라에 그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KBS ‘인간극장’ 홈페이지에는 이씨를 통해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됐다는 감사의 글이 줄을 이었다.
이씨가 처음 미국 땅을 밟은 것은 지난 73년. 당시는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많은 한국인들이 미국 이민길에 오르던 때였다. 한국에서 약사로 일하던 이씨의 아버지도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미국 이민을 택했고, 당시 여덟 살이던 이씨는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정착한 미국 땅에서 겪은 좌절과 절망
사지마비 장애 극복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수석 레지던트 된 이승복

“서울에 살 때 우리 집엔 늘 웃음이 가득했어요. 아버지가 꽤 큰 규모의 약국을 운영하셨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넉넉했고, 어머니는 늘 집에서 저희를 보살펴주셨거든요. 할머니, 할아버지, 여러 친척들과 가까이 살아서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어요. 미국으로 떠날 때 아버지는 그곳에 가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거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막상 제 앞에 닥친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이씨 가족이 처음 정착한 곳은 뉴욕 퀸스 구역의 플러싱이란 곳으로, 가난한 흑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었다. 이씨 부모는 그곳에서 사업을 벌여 돈을 모을 생각이었지만, 서울에서 구상했던 사업은 실패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믿었던 친구에게 사기까지 당하고 말았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부모님의 얼굴조차 볼 수 없게 된 거였어요. 두 분 다 돈을 벌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공장으로, 한인 슈퍼마켓으로 일하러 다니셔야 했거든요. 우리 형제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집을 나가셨다가 모두 잠든 깊은 밤에야 돌아오시는 생활이 계속됐죠. 서울에서는 고생을 모르고 사셨던 분들이라 참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가끔 엄마를 만나 달려들어 안기기라도 하면 귀찮다고 피하셨을 정도로요. 지금이야 다 우리를 잘 키우기 위한 일이었다고 이해하지만, 철없던 그 시절엔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죠.”


영어를 전혀 못하던 이씨 형제들은 학교에서도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자신을 보호해줄 이가 아무도 없었다.
“제가 큰아들이잖아요. 얼른 자라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난한 나라에서 이민 온 동양인이라고 우리를 무시하는 미국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노라고 마음먹었죠.”
그때 그의 눈에 체조가 들어왔다고 한다. 어느 일요일, 늘 다니던 한인교회 옆 YMCA 체육관에 농구를 하러 갔다가 또래 소년들이 봉을 짚고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을 본 것이다. 난생 처음 체조를 보고 ‘사람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력적인 운동’이라고 생각하며 집에 돌아온 그날, 그는 TV를 켰다가 우연히 몬트리올 올림픽 체조경기 중계방송을 보게 됐다. 루마니아의 꼬마 소녀 나디아 코마네치가 완벽한 연기로 체조 사상 최초의 10점 만점을 받으며 세계를 뒤흔든 바로 그 장면이었다.
“어떻게 같은 날 두 가지 우연이 겹쳤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하지만 전 그 순간 ‘아, 이게 운명이구나’라고 생각했죠. 체조를 해서 금메달만 따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열한 살 꼬마 소년에게 올림픽 체조 금메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꿈이 됐다고 한다. 다행히도 이씨는 체조에 소질이 있었다. 돈이 없어 YMCA에서 무료 청강생 자격으로 수업을 들었는데도 이듬해 지역 체조시합에서 마루운동 부문 1등을 차지했다. 79년에는 뉴욕주 시합에서 마루운동 부문 챔피언이 됐고, 코치의 권유로 미국 국가대표 상비군을 키우는 펜실베이니아주 앨런타운 체조훈련센터에 들어가 체계적인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이씨는 82년 전미대회에서 마루 1등, 도마 1등, 종합순위 3등을 기록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코치들 사이에서 그를 미국 국가대표팀에 넣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미시간대, UCLA,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등 체조팀을 운영하고 있는 거의 모든 대학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씨는 ‘대한민국 대표’로 올림픽 금메달을 따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이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을 유치하면서 그가 한국 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할 길이 활짝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성공이 눈앞으로 다가오던 순간, 그는 끔찍한 추락을 겪어야만 했다. 83년 7월5일, 코치의 지시를 어기고 혼자 마루를 뛰어 도약하다 턱에서부터 땅으로 처박히는 끔찍한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 사고로 이씨의 목뼈는 큰 손상을 입었고, 그의 미래도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사지마비 장애인이 된 것이다.
날쌔게 마룻바닥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던 그는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고, 봉을 힘차게 휘감던 손가락은 펜 한 자루 잡을 수 없을 만큼 뻣뻣해져버렸다.
“아주 화가 나고 실망스러웠어요. 평생 휠체어를 타야 한다는 것보다 이제 다시는 체조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어요. 금메달을 따야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는데, 세상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학교에서 날 놀리던 친구들에게 ‘대한민국 사람이 이렇게 대단하다’는 걸 자랑스레 보여줄 수 있는데…. 계속 이런 생각만 했어요. 제 꿈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공부하다 지칠 때면 혼자 엉엉 울어
그러나 병원은 이씨에게 새로운 기회의 터가 됐다. 그곳에서 두 번째 꿈을 발견한 것이다. 이씨는 ‘왜 내 몸이 이렇게 된 것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의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갖가지 의학서적을 찾아 읽다가 의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의사들은 환자의 고통을 몰라요. 자신들이 아는 것만,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하죠. 저는 ‘왜 저들은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하는 걸까’ 하고 답답해하다, ‘이러지 말고 내가 의사가 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 제가 궁금한 것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다른 환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을 테니까요.”

사지마비 장애 극복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수석 레지던트 된 이승복

그때부터 이씨는 체조에 매달리던 열정을 고스란히 공부와 재활훈련에 쏟아부었다. 어린 시절부터 체조선수로 활동하느라 공부를 제대로 해본 적이 없던 이씨는 “솔직히 처음에는 의사가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하며 환히 웃었다. 하지만 다섯 달 동안 책을 파고든 끝에 그는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 SAT에서 1천3백20점을 얻었고, 다음 해 뉴욕대에 합격했다. 그는 대학에서 훗날 세계적인 병원에서 다양한 인종의 환자들을 돌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로맨스어(라틴어에서 분파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등을 이르는 말)’를 전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을 마칠 무렵 마침내 주위 사람들에게 의사가 되기 위해 메디컬 스쿨에 진학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받아주는 대학이 없자 컬럼비아대 대학원에 진학해 공중보건학 석사 학위를 받은 후 다트머스 의대에 진학했고, 하버드 의대 인턴 과정을 수석으로 마친 뒤 존스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의 수석 레지던트가 됐다. 그 과정에서 그가 기울인 노력은 하나하나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공부하다 지칠 때면 혼자 엉엉 울곤 했어요. 전 비장애인에 비해 체력이 약해서 금세 지치는데, 공부는 몇 배 더 해야 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은 아무 어려움 없이 배우는 주사 놓는 방법, 청진기 사용법 등을 익히느라 며칠 밤을 새워야 할 때는 너무 고통스러웠죠. 휠체어를 탄 채 강의실 문턱을 넘지 못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을 때, 수술용 침대가 너무 높아 해부학 실험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했을 때도 마음이 많이 아팠고요. 하지만 단 한번도 공부를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는 의대에 진학한 뒤 비로소 자신의 장애가 다른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용기가 될 수 있음을 깨닫고 큰 감동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휠체어를 탄 채 의사 가운을 입고 병실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환자들은 강한 유대감과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씨는 지금껏 그의 불편한 몸을 거론하며 의사로서의 능력을 의심하는 환자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오히려 그의 경험을 듣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었다”며 눈물 흘리는 이들이 훨씬 많았다고. 그래서 이씨는 하루에 몇 차례씩 다른 병동의 의사들로부터 호출을 받곤 한다고 말했다. 극심한 고통 탓에 치료를 포기하려는 환자가 있으면 그를 격려하기 위해 이씨를 부르는 것이다.
“훨씬 유능한 선배 의사들도 하지 못하는 걸 전 할 수 있어요. 환자에게 새로운 용기를 북돋워주는 일이죠. 제가 장애인인데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이제는 평생 서로 사랑하고 돕는 반려자 만나고 싶어요”
사지마비 장애 극복하고 미국 존스홉킨스 병원 수석 레지던트 된 이승복

신체 장애를 이기고 의사가 된 이승복씨와 어머니 정보숙씨.


그러나 이씨는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자신의 사지마비 장애를 치료해야 하는 환자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의사가 된 뒤에도 장애인으로서 그의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스스로 세수하고, 밥 먹고, 옷 입고, 출근하기 위해, 그는 날마다 의대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하던 시절 못지않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씨는 “장애를 겪지 않았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한계 앞에서 번번이 좌절하다 이제는 손발이 자유롭던 시절을 아예 잊기로 했다. 일상적인 모든 일들을 완전히 새로 배웠다”고 말했다. 3년 전 중풍으로 왼쪽 몸이 마비된 어머니 정보숙씨(65)가 그의 집에 머무르며 일상생활을 돕고 있지만, 어머니 역시 장애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아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더 많다. 어머니가 할 수 없는 일은 이씨가 돕고, 이씨의 어려움은 어머니가 도우며 함께 살고 있는 자칭 ‘환상의 모자팀’이 바라는 것은 이씨가 어서 착하고 마음 따뜻한 배우자를 만나는 것이다.
“제 사연이 방송에 소개되고 난 뒤 저와 사귀고 싶다는 메일이 하도 많이 와서 기대가 커요(웃음). 저랑 평생 서로 믿고 도우며 살 수 있는 사람,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싶어요.”
이씨는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나라에 돌아와 일하고 싶다는 꿈을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한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나라 초등학교 교과서를 구해 날마다 소리 내 읽었을 정도. 그래서인지 그의 한국어 실력은 미국에서 30년 이상 산 사람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유창하다.
“우리나라를 정말 사랑하지만, 장애인 복지 면에서 볼 때는 부족한 게 아직 너무 많은 것 같아요. 언젠가는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이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하고 싶어요. 가깝게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한국 체조팀 닥터가 되고 싶기도 하고요. 다음에 우리나라에 돌아올 때는 저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러 오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단 한번도 꺾지 않았던 이씨, 인생의 금메달을 향한 그의 도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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