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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딸 앞에서 한없이 비굴해지는 나

입력 2005.10.05 15:00:00

내 어머니는 언제나 어른스럽게 자식들을 지켜주신 분이었다. 하지만 그 어머니의 딸인 나는 딸을 친구처럼 의지하고 도리어 딸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얼마 전엔 남의 기분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딸에게 훈계를 하고선 바로 다음 순간 내가 한 말을 뒤집는 ‘비굴함’을 보여 민망해지기도 했다. ‘멋있는 엄마’가 되기란 쉽지 않으니 딸의 위로처럼 ‘친구 같은 엄마’인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겠다.
딸 앞에서 한없이 비굴해지는 나

내 인생에 가장 잘한 일은 딸을 낳은 것이지만, 내가 하는 일 중에 제일 서투르고 못하는 일도 엄마 역할이다. 나를 낳아주신 엄마는 정말 훌륭한 어머니셨다. 언제나 어른다우셨고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을 하지 않았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셨다.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비난받을 행동을 한 적이 없고, 친지나 이웃 돕기에도 앞장섰다.
아직도 엄마가 우리 남매들에게 직접 짜주셨던 털스웨터, 읽어주셨던 책, 만들어주신 맛있는 음식들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의 사업이 쫄딱 망한 적도 있다던데 우리가 전혀 눈치를 못 챌 만큼 엄마는 완벽히 우리를 보호해주셨다.
그런데 왜, 왜, 그 어머니의 딸인 나는 훌륭하기는커녕 정상적인 엄마 노릇도 힘들까. 유일하게 딸아이에게 내세울 게 있다면 1년 동안 모유를 먹인 것과 이유식을 직접 만들어 먹인 것 정도뿐이다. 그것 역시 전업주부 시절 젖 먹이는 데 남의 눈치 볼 필요가 없고 우윳병을 소독하기 귀찮아 선택한 일이라 그리 자랑할 것도 못 된다. 남들이 보기엔 딸과 영화도 잘 보러 가고, 여행도 자주 가는 것 같지만 그것 역시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 딸을 위해 희생한 적은 없다.
딸 앞에서는 나의 유치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딸아이의 말 한마디에 수시로 삐치고, 딸에게 각종 협박을 해대고, 함께 만화책을 보며 키득거린다. 난 몸이 조금만 아파도 많이 아픈 것처럼 엄살을 떤다. 야한 만화를 몰래 보다가 딸에게 들킨 적도 있다.
게다가 급변하는 정보화 시대가 되고 보니 내가 딸에게 가르쳐줄 것은 별로 없고 휴대전화, 디지털카메라 등 신형기기 사용법이나 컴퓨터 기능, 최신 유행정보, 연예인 이름 등 딸아이에게 물어봐야 할 것 천지다. 그러니 신세대 정보를 얻고 생활이 불편하지 않으려면 딸에게 아양을 떨고 점점 비굴해질 수밖에 없다.

딸에게 응석 부리고 치부도 내보이는 엄마
친절한(?) 딸아이는 아직은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아프지마’란 문자 메시지도 보내주고 걱정하는 척해준다. 또 수험생이지만 엄마에게 무리한 요구를 전혀 하지 않는다.
외동딸이라 성격이 모가 난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딸아이는 바깥에 나가면 아주 상냥하고 착한 태도를 보인다. 얼마 전 갑자기 삼겹살을 먹고 싶다기에 둘이 동네 식당을 찾아갔다. 평소 눈에 안 띈 식당이어서 “언제 문을 열었어요?”라고 물어보니 아주머니가 굉장히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10년도 넘었어요. 맛있다고 소문난 집인데, 이 동네에 안 사는 모양이네”라고 했다.
소문난 장수 식당을 못 알아본 죄로 우리 모녀는 얌전히 삼겹살을 먹었는데 솔직히 맛이 별로 없었다. 가위로 고기를 잘라주던 아주머니는 “왜 이렇게 천천히 먹어? 우리 삼겹살이 맛이 없수?”라고 약간 무서운 표정으로 물었다. 딸아이는 즉시 “아뇨, 아뇨. 아주 맛있어요. 점심을 늦게 먹어서 배가 불러서요”라면서 계속 거의 탄 삼겹살을 먹었다. 나중에 식당을 나와서 “정말 맛있었냐”고 물으니까 “아니, 맛은 없지만 그런 말을 어떻게 해. 다음에 안 가면 그만이지”라고 했다.
“너 앞으론 그렇게 비굴하게 살지 마. 우리가 돈 내고 먹으면서 억지로 맛있다고 칭찬해줄 필요는 없어. 넌 항상 너무 남의 입장과 마음에 신경 쓰는데 남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하기보다는 때론 솔직하게 말하는 게 그 사람 인생이나 네 정신 건강에도 좋아. 왜 거짓웃음을 짓니. 또 네가 남을 배려하고 신경 써주는 것처럼 남들도 널 챙겨주는 건 아니잖아.”
오랜만에 딸에게 이런 ‘교훈’을 설파한 후 우리는 계속 동네를 산책했다. 그러다 새로 문을 연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다. 유명 연예인이 주인인지 창문에 그 연예인의 사진이 크게 걸려있고 동료 연예인들이 보낸 화환도 보였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특유의 ‘비평’이 시작됐다.

딸 앞에서 한없이 비굴해지는 나

“얘, 저 사람은 자기가 안티팬이 많은 걸 모르나보다. 차라리 자기 사진을 보여주지 않는 게 영업에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그리고 동료들과 인간관계도 별로 안 좋은가봐. 화환이 너무 빈약하지 않니? 후후후.”
딸아이는 공부할 때 야식으로 먹겠다며 샌드위치를 사달라고 했다. “혹시 그 연예인이 나와 있는 것 아냐” 하고 키득거리며 가게에 들어섰다. 영업시간이 막 끝났다고 했다. 그래도 “샌드위치 하나만 만들어주시면 안될까요?”라고 물으니 주방장 옷을 입은 사람이 “오셨으니 해드릴게요”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그 연예인이었다. 그는 주문을 받은 후 정말 친절하게 재료를 듬뿍 넣어서 직접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고마운 마음에 내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어머, 직접 만드시기도 하는군요. 우리 동네에 가게를 여셔서 정말 감사해요. 딸아이가 이 브랜드 샌드위치를 워낙 좋아해서요. 앞으로 자주 올게요.”
갑자기 내 옆에 서 있던 딸아이가 입으로 손을 가리더니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아하고 상냥하게 계산과 인사를 마치고 나오니 딸아이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무슨 일이냐니까 주저앉아 마구 웃기 시작했다.
“내가 엄마 땜에 못살아. 사람이 어쩜 그러우? 뭐? 나보고 비굴하게 살지 말라고? 안티팬이 많다는 둥 얼굴을 안 보이는 게 낫다는 둥 흉을 보던 사람이 어떻게 ‘우리 동네에 와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해? 웃음이 나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나왔어. 엄마, 제발 그렇게 살지 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비굴한 에미는 샌드위치 봉지를 팔랑거리며 13cm나 더 큰 딸아이 뒤를 딴청을 피우며 따라갔다.

멋있는 엄마가 되고 싶지만 딸을 능가하는 건 나이와 몸무게뿐
가식적인 모습으로 억지로 딸에게 존경받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딸에게 너무 치부를 노출시키는 것 같다. 예전엔 내가 읽은 책이나 시사정보 등 알량한 상식이나 경험담으로 아이를 제압할 수 있었는데 이젠 엄마가 아니라 인터넷 지식검색을 찾는다. 딸아이를 능가하는 것은 오로지 나이와 몸무게뿐. 한숨을 쉬며 앉아 있는 내게 딸아이가 와서 말했다.
“엄마, 사랑해. 솔직히 내 친구들 중에 엄마랑 나처럼 대화 많이 하는 모녀 없어. 내 이야기 잘 들어주고, 재미있게 해주고,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내가 해달라는 것 해주려고 노력하잖아. 엄마에게 정말 감사하고 있어. 그런데 엄마,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져서 카디건이 하나 필요하거든. 마침 인터넷 쇼핑몰에서 아주 싸고 예쁜 걸 발견했지. 엄마랑 나랑 같이 입어도 되겠어. 같이 구경하러 가자….”
‘이건 아닌데’ 싶었지만 약점 많은 엄마는 딸의 손에 끌려 컴퓨터 앞에 앉았다. 어떻게 해야 멋지게 역전을 해서 잃어버린 모권을 찾을 수 있을까. 이제라도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이 한 몸 바치면 딸아이가 감동할까. 아니, 그러기엔 이미 난 충분히 비굴하다.


여성동아 2005년 10월 5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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