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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같은 삶

여공, 술집마담 전전하다 대학생활 시작, 시인으로 거듭 태어난 이기와 굴곡진 인생 고백

“동트는 새벽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과 순결해지고 싶은 열망이 시를 공부하고 쓰게 만들었어요”

글·최호열 기자 /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 2005.10.05 10:51:00

해녀였던 어머니의 막내딸로 태어나 공장 노동자, 술집마담을 전전하고 이혼의 아픔까지 겪는 질곡의 삶을 살아온 젊은 여인이 있다. 최근 여행산문집 ‘시가 있는 풍경’을 펴낸 시인 이기와씨의 드라마보다 더 가슴 찡한 인생역정을 들어보았다.
여공, 술집마담 전전하다 대학생활 시작, 시인으로 거듭 태어난 이기와 굴곡진 인생 고백

“산호같은 눈빛과 미역 같은 머릿결을 지닌 해녀가 있었지. 내일 따려고 전복이 있는 자리를 바다 속에 표시해둔 채 그만 열일곱 살 앳된 나이에 뭍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는 사납고 성미가 급해 시집온 지 1년밖에 안된 며느리를 태기가 없다고 쫓아내버렸단다. 친정에서 소박맞은 딸을 받아줄 수 없다고 내치자 해녀는 울며불며 서울로 상경했어.
미처 따지 못한 전복을 그리며 혼자 살다 근본도 모르는 사내와 다시 부부의 연을 맺었지. 아이를 못 낳는 것은 해녀의 탓이 아니어서 두 번째 남편과는 딸 둘, 아들 하나를 보았어. 그러나 박복하게도 남편은 공사판에서 일을 하다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었고, 그 후 시름시름 앓다 결국 죽고 말았단다. 먹고살기 막막해진 해녀는 아들은 부잣집 양자로, 큰딸은 남의 집 식모로 보냈어. 그리고 자신은 술을 따르며 어린 딸과 밑바닥 생활을 해야 했단다.
그 후로도 어긋난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보려고 고물장수와 살림을 꾸려보기도 하고, 강냉이장수와 살아보기도 했지만 몇 년 못 가 도로 과부가 되고 말았어. 뒤늦게야 지아비는 바다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바다는 자기를 떠난 해녀가 부정하다며 다시 돌아오라고 손짓하지 않았지. 결국 알코올 중독에 빠져 살던 해녀는 바다의 부유물처럼 떠돌다가 어느 야시장 음식물 찌꺼기 냄새 흐르는 담 아래서 한 덩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는데, 해녀의 몸은 이상하게도 지독한 그리움의 물이 든 양 바닷빛으로 새파랗게 멍들어 있었단다.”
제주도의 바닷가를 찾은 ‘해녀의 딸’ 이기와씨(본명 이경옥·37)가 바다를 보며 함께 온 딸에게 들려준 그의 어머니 이야기다. 그런데 이기와씨의 삶 역시 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2001년 첫 시집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에서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도발적인 시로 승화시켰던 그가 최근 시의 배경이 된 곳을 여행하며 느낀 단상을 모은 산문집 ‘시가 있는 풍경’을 펴냈다. 여기서도 그는 지난했던 삶의 편린들을 거침없이 털어놓는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신경림 시인의 시 ‘산1번지’의 배경이 된 홍은동 산1번지를 찾아서는 “신경림 시인은 여기서 4년을 살았다고 하는데, 난 이런 곳에서 18년을 살았다. 서대문 굴레방다리 아래 움막집에서 4년, 성산동 판자촌에서 4년, 양평동 판자촌에서 2년, 목동 판자촌에서 3년, 신월동 달동네에서 3년, 그리고 뚜렷하지 않은 2년은 철거기간 동안 군용 천막을 리어카에 싣고 정착할 곳을 찾아 이동하다 보낸 기간이다. 치가 떨리고 악이 받치게 살았던 내 고향 빈민굴”이라고.

외로움에 일찍 가정 꾸렸지만 남편 노름 빚에 시달리다 이혼
그를 만나기 위해 김포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았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그의 집은 햇볕이 잘 드는 양지를 마다하고 그늘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제 삶이 그래서인지 약간 습하고 그늘진 것이 좋아요. 한적하고 습한 이곳이 참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래서 2001년 말에 있는 재산을 다 털어 계약했어요.”
68년에 태어난 그는 서울 서대문 굴레방다리 밑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던 여섯 살 무렵 아버지를 잃었다. 뒤이어 판자촌마저 헐리자 모녀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어머니는 공사판과 공장을 떠돌며 포장마차를 하는 고단한 삶을 이어갔고, 그는 시장골목을 헤매며 주린 배를 채우기 일쑤였다. 갑자기 사라진 오빠를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고 한다. 오빠는 지금도 소식을 알 수 없다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어머니는 남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어린 딸을 혼자 내버려두고 다닐 수 없어 남자들과의 술자리에도 딸을 데리고 갔다. 그리곤 낯선 남자와 동거에 들어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살림은 늘 단칸방이었다.
“당시 어린 저로서는 큰 충격이었어요. 하지만 어머니에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죠. 그저 어머니 곁에서 사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고, 배고프지 않게 먹는 게 중요했어요.”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도 그는 봉제공장으로, 중국집 종업원으로, 가정부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중3 때 어머니마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한 것.
외로움 탓이었을까, 그는 남자를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고1 때 열 살 위인 남자를 알게 되었다. 동네 공원에서 밤늦도록 통기타를 퉁기던 사람이었다.
“그 남자에게 사랑을 느꼈다기보다는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늘 부유하듯 떠돌던 삶에 안정감을 갖고 싶었던 거죠.”
하지만 결혼은 쉽지 않았다. 아직 고등학생인데다 고아였기에 남자의 집에서 허락을 안 했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가는 게 너무 쓸쓸하고 암담했던 그는 더 살아도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다는 절망감에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2 때 학교를 뛰쳐나왔다.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다. 낮에는 평범한 레스토랑이지만 밤에는 술을 파는 곳이었다. 손님 옆에서 웃음을 팔면 팁이 손에 쥐어졌다. 먹고살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려서부터 절감했던 그로서는 돈의 유혹을 뿌리치기 쉽지 않았다.
6개월이 지나자 돈을 더 많이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 인사동에 있는 일본인 상대 술집으로 한복을 입고 술시중을 드는 곳이었다. 요정 기생이 된 것이다. 귓가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젊은 그에게 더 큰 요정에서 앞다퉈 손짓을 해왔다.
“그런 일을 하는 걸 부끄러워한 적 없어요. 어려서부터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돈에 대한 애착이 강했어요. 돈이 많은 게 성공하는 거라는 생각밖에 없었죠.”
그렇게 모은 돈이 1천만원을 넘자 그는 요정을 그만두고 기타를 치던 남자와 결혼했다. 직업이 없던 그 남자로서는 결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사이 딸아이도 생겨났다. 그는 미용기술을 배워 알음알음 동네 사람들의 머리를 만져주다 직접 미장원을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직장이 없던 남편이 노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노름을 하느라 몇날 며칠을 안 들어오는가 하면 어느 날은 흠씬 두들겨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오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을 쳤지만 노름빚은 자꾸만 불어났다. 마침내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빨간딱지를 붙이기 시작했다.
“제 유년시절이 불행했기 때문에 가정만큼은 제대로 꾸리고 싶었어요. 이혼을 하면 그렇게 원망했던 어머니와 같은 삶을 걷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들었고요. 그래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남편이 고장났으면 수리해서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제발 정신 차리라고 애원도 하고 설득도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결국 노름빚으로 집마저 빼앗긴 채 오갈 데가 없어졌을 때에야 이혼을 결심했다. 그래도 아이만은 포기할 수 없어 그나마 몇 푼 남은 돈을 남편에게 다 주고 양육권을 가져왔다.
이혼 후 그는 카페를 하나 얻어 술장사를 시작했다. 포장마차를 하기도 했고, 룸살롱 마담으로 일하기도 했고 민속주점을 운영하기도 했다.
“새벽까지 장사를 하고 문을 닫으면 동이 터요. 하늘 저 끄트머리에서부터 점점 파래지는 여명 있잖아요. 그걸 보고 있노라면 묘한 생각이 들어요. 순결해지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나고….”

술냄새 풍기며 학원 강의실에 앉아 대입 준비
당시 그에겐 새벽에 일을 마친 후 술집 종업원들과 술을 마시는 게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낙이었다.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이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서점을 들르게 됐다고 한다.
“두꺼운 책은 보는 순간부터 머리가 아파서 얇은 책을 하나 샀어요. 시집이었는데, 그걸 읽으니까 마음이 맑아지는 걸 느꼈어요. 술로 나를 위로할 때보다도 더 마음에 위안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한권 두권 시집을 읽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시를 쓰고 싶더라고요.”
술과 웃음을 파는 틈틈이, 혹은 화장실에 앉아서 노트에 쓰기 시작한 시가 2백 편이 넘자 ‘내가 쓰는 게 시가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주위에선 시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손님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는데 모두들 자기는 시를 모른다며 “시인에게 보여주라”고 했다.

여공, 술집마담 전전하다 대학생활 시작, 시인으로 거듭 태어난 이기와 굴곡진 인생 고백




“시인이 어디 있냐고 하니까 대학에 가면 있대요. 그래서 대학에 가기 위해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화장 짙게 한 여자가 술냄새 팍팍 풍기면서 학원 강의실에 앉아 있었으니 학생들이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어요. 제가 생각해도 웃음이 나와요.”
93년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이듬해 한양여대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거기서 본격적으로 시를 배운 그는 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지하역’이 당선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장사를 계속했어요. 가방 하나 들고 낮에는 학교로 밤에는 술집으로 출근하는 식이었죠. 한번은 수업시간에 가방이 쓰러졌는데 거기서 소주 병뚜껑과 병따개들이 우르르 쏟아져 교수님이 놀란 적도 있어요.”
그는 2000년 민속주점 운영을 끝으로 술장사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일이 너무 힘든데다 몸이 많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전 다행인 게 이 계통에서 일하면서 더 안 좋은 곳으로 빠져들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급한 마음에 사채를 당겨썼다가 돈 때문에 윤락가로 팔려간 아가씨들도 있잖아요.”
술장사를 하면 만나는 게 남자들이다. 재혼을 할 기회도 많았을 것 같다는 말에 그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답한다.

몇 년 후 빈곤국에서 기쁨과 아픔 나누며 살고 싶어
“남자에 대해 너무 많은 걸 경험했기 때문에 질린다고 할까, 그래서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남자에 대한 신비감이 없으니까요. 이상형을 만나야 사랑을 하는 법인데, 전 이상형이란 없다는 사실을 너무 빨리 깨달은 것 같아요.”
이제 여고생이 된 딸아이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그는 딸에 대한 칭찬을 그치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엄마를 이해해주고 편하게 해주는 속 깊은 딸이라고.
“아이에겐 미안한 마음이 많죠. 돈 번다고 다른 사람에게 24시간 맡기기도 했고, 아이를 맡길 데가 없을 때는 신문배달과 포장마차를 같이하면서 데리고 다니기도 했어요. 우리 딸 정말 착해요. 조금 크니까 자기가 스스로 와서 서빙 등 심부름을 하더라고요.”
김포로 옮겨온 후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행복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뇐다고 한다. 밭에 모종을 심고, 오이를 따고, 고추를 말리고, 고구마를 캐는 등 과거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일들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물론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게 살림에 여유가 생겨서는 아니다. 이곳에서 그는 글을 쓰고 편집하는 일을 병행하고 있다. 또한 김포시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시창작 강의를 할 예정이다. 내년엔 두 번째 시집을 출간할 계획도 갖고 있다.
“첫 시집에선 혼란하고 탁한 세상에서 산낙지처럼 온몸이 토막나면서도 몸부림을 멈추지 않는 처절한 삶을 그리고 싶었어요. 이제 세상과 화해를 하고 나니 좀 더 관조적으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두 번째 시집에서 그런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또한 내년엔 지금보다 좀 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떠날 생각이라고 한다. 고독하게 혼자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깊은 산속이나 섬 같은 곳으로 들어갈 생각이라고.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을 버리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 제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시’인데 이걸 한번 놓아볼 생각이에요. 저도 알게 모르게 시인이란 타이틀에 집착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자연들이 이름표 달고 왔다가 가는 거 아니잖아요. 왔는지 모르게 왔다가, 가는지 모르게 가는 생명들이 모여 우주가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이어져 가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 가는 게 외롭지 않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아도 누구도 그립지 않겠다는 자신이 들어요.”

그는 늦어도 3년 후쯤에는 연고가 전혀 없는 더 먼 곳으로 훌쩍 떠날 생각이라는 말도 했다.

“외국을 돌아다니고 싶어요. 여행은 아니에요. 아프가니스탄 같은 절대빈곤국가라고 불리는 곳을 돌아가며 6개월이나 1년씩 머물며 살고 싶어요. 거기서 봉사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기쁨과 아픔을 같이 나누며 살고 싶어요. 참 신기한 게 빈곤국가 사람들일수록 그들의 웃음은 왜 그렇게 터무니없이 밝은지 모르겠어요. 그 비밀을 풀고 싶어요.”
그의 말에서 밑바닥 삶의 절망 속에서 그가 건져올린 것이 희망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낙지

좁은 바닥을 비집고 전신을 비틀어 춤을 추는,살고 싶어 환장한,몸통을 내팽개치고 토막토막 달아나는,정신나간 수족들곱게 일그러진 일상의 내장 질질 끌고요염하게 람바다 춤을 추는,고통이 일제히 발광하는,서서히 자신을 죽여가며 즐기는,속의 내용물을 모두 빼놓고 쓸개 없이 돌아다니는,먹물로 화장하고 때 빼고 광내고물 좋다는 바닥으로 기어 나와바람난 세상과 블루스를 추는,완강하게 붙잡고 있던 이성을 동강내고도마 위에 올라가 문란한 정서와 지르박을 땡기는서로의 목을 감고 허리를 감고 일회용 목숨을 감고모처럼 땀에 젖어 흐느적거리는 허무에 칭칭 감겨,불쑥 미치고 싶은,

당신을 어떻게 요리해 드릴까요?

- 시집 ‘바람난 세상과의 블루스’ 중에서

여성동아 2005년 10월 5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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