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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감동 인생

와리스 디리의 드라마틱 삶 고백

아프리카 유목민 소녀에서 톱모델, 여성 성기절제에 반대하는 유엔 특사로 거듭난

기획·김동희 / 발췌 정리·이승민‘자유기고가’ / 사진·섬앤섬ⓒworld connection 제공

입력 2005.08.31 14:55:00

아프리카 소말리아의 유목민 소녀에서 세계적인 슈퍼모델이 된 와리스 디리(40).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할례 경험을 고백하며 여성성기절제반대운동에 앞장서는 유엔 특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자전 에세이 ‘사막의 꽃’을 펴내 화제를 모으는 와리스 디리의 드라마틱한 삶을 소개한다.
와리스 디리의 드라마틱 삶 고백

유엔 특별사절로 여성성기절제반대운동에 활발하게 나서고 있는 와리스 디리.


소말리아에서는 여자의 성기가 청결하지 않다고 믿는다. 그래서 할례의식을 통해 제거한다. 음핵과 소음순, 대음순을 잘라내고 일부만 남긴 채 꿰매 봉한다.
그러나 할례 의식의 자세한 부분은 비밀로 남아 있다. 의식을 받게 되는 소말리아의 사춘기 소녀들은 ‘때가 되면 어떤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고만 알고 있어 어린 아이에서 여성으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할례의식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한다. 차츰 사춘기에 이르지 않은 어린 소녀들에게도 할례를 하게 돼 나는 다섯살 때 할례를 받았다.
할례를 행하는 여인은 긴 손가락을 뻗어 면주머니 안에 넣더니 부러진 면도날을 꺼냈다. 그리고 면도날을 뒤집으며 양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들쭉날쭉한 면도날에는 피가 말라 붙어 있었다. 여인은 면도날에 침을 뱉더니 옷에 닦았다. 여인이 면도날을 닦는 동안 엄마는 스카프로 내 눈을 가렸다. 눈앞은 캄캄해졌다.
그리고 곧 내 살이, 내 성기가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무딘 칼날에 쓱싹쓱싹 살이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그 느낌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잘려나가는 부분이 온몸을 통틀어 가장 민감한 부분이라는 점만 제외하면 누군가가 허벅지의 살이나 팔을 자르는 느낌과 비슷하다.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나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많은 여자 아이들이 출혈과다, 쇼크, 감염, 파상풍 등으로 인해 더 심각한 고통으로 괴로워하다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할례가 거행되는 그 열악한 환경을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오히려 나처럼 살아남은 여자들이 놀라울 따름이다.
열세 살이 되었을 무렵 아버지가 낙타 다섯 마리를 받고 노인에게 나를 시집보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무작정 집을 나왔다. 아버지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며칠을 굶으며 사막을 가로질러 걷다가 사자 밥이 될 뻔했고, 낙타몰이에게 채찍으로 맞았고, 트럭 운전사에게 폭행을 당하며 아버지의 형제인 아메드 삼촌 집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 언니 집으로, 이모 집으로 돌아다니며 집안일을 해주며 살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런던 주재 소말리아 대사인 이모부가 가정부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런던에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모부가 준 여권을 경이롭게 살펴보았다. 나의 첫 공식 신분증이었다. 나는 출생증명서도, 내 이름이 적힌 어떤 서류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나는 우쭐해져서는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고 소말리아를 떠났다.

열세 살 때 강제결혼 피해 런던행 비행기에 올라
아프리카에서는 부유한 집에서 가난한 친척 아이를 맡아 기르는 일이 흔하다. 아이는 그 대가로 집안일을 돕는다. 때때로 그 부유한 친척은 친척아이에게 공부도 시키며 친자식처럼 대해주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나는 내가 처한 상황이 전자이길 바랐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단지 가정부일 뿐이었다. 그 사실이 잔인할 정도로 명백해지고, 길고 고된 일과와 겹치자 런던에 오면서 느꼈던 기쁨은 시들해졌다.

와리스 디리의 드라마틱 삶 고백

2004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열린 세계 여성의 상 시상식에서 세계 사회(인권)상을 받은 와리스 디리.



4년간의 대사 생활이 끝난 이모부와 이모는 소말리아로 돌아갔지만 나는 런던에 남았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하지만 나를 노예처럼 부려먹는 이모와 이모부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어떻게든 잘될 거라고 믿었다. 이모 가족들과 헤어진 첫날 할우라는 친구를 만났고, 할우의 도움으로 그녀의 집에 머물며 맥도널드 점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맥도널드에서 주방 보조로 일하면서 나는 가정부 일을 할 때 배운 기술을 써먹었다. 부엌에는 늘 일손이 모자랐지만 나는 감히 불평하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나는 내 손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뿐이었다.
어느 날 오후 맥도널드에서 일을 마친 후 예전에 가정부로 일할 때 사진을 찍자며 따라다니던 말콤이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할우와 함께 그 남자가 일하고 있는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말콤은 나의 옆모습을 찍고 싶다고 했다. 메이크업하는 여자가 나를 의자에 앉히더니 작업에 들어갔다. 메이크업을 마치고 스튜디오에 들어가자 말콤은 카메라 앞에 나를 앉혔다. 딸깍 소리가 나고 뒤따라 ‘펑’ 하는 소리가 나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불빛이 ‘펑’ 하고 번쩍인 순간 나는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TV에서 본 배우가 된 듯했다.
이 사진을 계기로 나는 기획사에서 연락을 받았고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됐다. 테렌스 도노반이 찍는 피렐리 달력을 시작으로 영화 ‘007 리빙 데이라이트’에도 출연하고, 돈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병원을 찾아 질 입구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수술을 받았다. 변기에 앉아 시원하게 소변을 볼 수 있었다.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자유였다.
1991년 나는 홀로 미국에 도착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기획사에서는 수많은 일거리를 구해놓고 있었다. 나는 오일 오브 올레이(미국의 화장품 회사) 광고에 나온 최초의 흑인 여성이 되었고, ‘엘르’ ‘얼루어’ ‘글래머’ ‘보그’와 같은 유명한 패션 잡지에 등장하게 되었다.
모델 일을 하면서 경험을 쌓고 자신감을 갖게 되다 보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분야가 생겼다. ‘런웨이’라 불리는 패션쇼였다. 일 년에 두 번, 디자이너들은 새 디자인을 공개하기 위해 패션쇼를 여는데 이 패션쇼는 밀라노에서 2주간 계속된다. 그 다음은 파리, 그 다음은 런던, 그리고 뉴욕으로 이어진다. 유목민이었던 내게 이동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최소한의 짐을 꾸리고 일자리를 따라 움직이면서 인생이 주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최대한 활용했다.
나는 모델 일을 통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고, 아름다운 나라들을 보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세계를 돕는 데 힘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가난에 찌든 소말리아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나는 인기 스타나 유명인이 되고 싶어서 모델이 된 것은 아니다. 내가 모델이라는 직업을 즐기는 이유는 내가 세계인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들을 다닐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고통받은 과거 고백하고, 여성 할례에 반대하는 유엔인구기금 특별사절로 활동
95년 봄, BBC에서는 내 일생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했고, 그 덕분에 15년 만에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15년 만에 본 엄마는 많이 늙어 있었다. 사막에서 지독하게 힘든 생활을 한 결과였다. 나는 엄마에게 나와 함께 영국이나 미국에 가서 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엄마를 위해서 뭘 해주고 싶으면 아프리카, 여기 소말리아에 집을 마련해줘. 여기가 엄마 고향이야. 엄마는 여기밖에 몰라.”
뉴욕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중 밴드 멤버로 활동하고 있는 데이나를 만났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데이나의 아이를 가질 거야”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데이나에게 설명했다. 나는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사람이라고.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난생 처음 남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데이나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느껴진 이유는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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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세계 여성의 상 시상식 리셉선장에서.



데이나와 결혼하고 아들 알리크가 태어난 순간 내 인생은 또한번 달라졌다. 이제는 알리크가 나의 전부다. 사소한 불만과 걱정도 이제는 뒷전이다. 나는 아들을 낳고 나서야 비로소 생명이라는 하늘이 준 선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이를 먹고 아는 것이 많아지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할례를 받은 이후 내게 생겼던 문제들은 나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여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우리 엄마처럼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막의 여자들을 누가 도울 것인가? 누군가 말없는 소녀를 대신해서 나서야 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유목민이었으므로, 그들을 돕는 것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에서 할례받은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접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나에게 격려 편지를 보냈다. 나는 더 많은 인터뷰를 하기 시작했고 학교나 지역 사회단체뿐만 아니라 여성 할례문제를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성 할례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고 있던 유엔인구기금이 나에게 동참을 권한 것이다. 나는 유엔인구기금의 제안을 받아들여 특별사절로서 여성성기절제 (FGM;Female Genital Mutilation) 반대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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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GM을 비난하는 나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내가 우리 문화의 가치를 모른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나는 내가 아프리카 사람이라는 사실에 매일 알라신께 감사하고 있다. 할례의 경험을 제외하면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그 누구의 어린 시절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어린 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소박한 삶의 방식을 즐기지 못했을 것 같다. 전 세계가 여성에게 안전한 곳이 될 때까지, 나는 일하고 또 일할 것이다. 인샬라, 하늘의 뜻대로 되리라.
※ 이 글은 최근 출간된 ‘사막의 꽃’(섬앤섬)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여성동아 2005년 9월 5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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