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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무대 위에서 빛나는 여자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공연 무대 서는 배우 박정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사랑할 줄 아는 배우, 사랑을 연기하는 배우로 살고 싶어요”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5.08.31 13:11:00

8월2일부터 오는 9월25일까지 서울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우리 시대 어머니상을 실감나게 연기하고 있는 배우 박정자. 연기 인생 40년 동안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는 그를 만나 잊을 수 없는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배우로 한길을 걸어온 열정적인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공연 무대 서는 배우 박정자

배우박정자(63)는 뜨거운 사람이다. 그가 무대에 오르면 관객들은 순식간에 이 배우가 뿜어내는 강렬한 카리스마에 사로잡힌다. 죽음을 앞둔 환자 역을 맡아 침대 위에서 가녀리게 떨고 있을 때조차 팽팽한 긴장감으로 객석을 압도하는 배우, 그가 바로 박정자다.
하지만 자연인 박정자를 만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잔잔한 눈웃음을 띤 채 먼저 손을 내미는 그는 뜨겁기보다 따뜻한 쪽이기 때문이다. 이웃집 아주머니처럼 살갑고 푸근하게 사람들을 챙기는 까닭에 박정자는 연극계에서 손꼽히는 마당발로 통한다.
지난 8월 초,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가 공연되고 있는 서울 마포구 산울림소극장에서 그를 만났다. 막 무대에서 내려온 박정자는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뜨거움’과 예의 ‘따뜻함’ 사이를 오가며 자신의 삶과 연극 인생에 대해 진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대 위에서 어머니를 흉내내고 있는 나를 느껴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외출 후 돌아오면 화장실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일을 보는 ‘엄마’. “오줌 마려워 죽겠네”라며 치마를 훌렁 들춘 채 화장실로 뛰어들어가고, 요리와 청소에 관한 잔소리로 하루를 보내는 그는 많은 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엄마’의 모습 그대로다. 늘 책과 타자기를 끼고 사는 작가 지망생 딸은 ‘신문은 사회면 밖에 안 보고, 채소 가격 말고는 세상에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엄마에게 사사건건 짜증을 부리다 ‘더 이상은 같이 못살겠다’며 집을 나가버린다.
지난 91년 초연된 이 작품이 10만 관객을 끌어모으며 4번째 앙코르 공연되고 있는 것은 이처럼 어느 어머니, 어느 딸이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만들어졌기 때문. 초연 때부터 이 작품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어머니 역을 맡아온 박정자는 사사건건 자신에게 대드는 딸의 고집을 걱정하면서도 속으로는 딸을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평생 남편과 자식만을 위해 살다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는 ‘어머니’를 생생히 그려내 매번 관객들의 눈물을 뽑아낸다.
그는 “내 나이 오십이 되던 해에 이 역할을 맡았는데, 벌써 10여년이 흘렀다”며 “처음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는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극장 한가운데 앉아 날 지켜보셨다. 무대 위에서 한참 연기에 몰두하다가도 어머니가 그때 앉아 계시던 자리에 눈이 가면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못 견디게 그립다”고 말했다.
박정자에게 어머니는 세상 누구보다 소중했던 존재. 양조장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그의 나이 네 살 때 열병에 걸려 세상을 뜬 뒤 어머니는 직물공장을 운영하며 홀로 다섯 자식을 키웠다. 6·25가 터져 큰 오빠가 군에 입대한 뒤에는, 어린 딸 넷을 데리고 강화도를 거쳐 제주까지 피란을 가며 독하게 이들을 키워냈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공연 무대 서는 배우 박정자

스스로“연기를 안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박정자는 무대 위에서 가장 뜨겁게 빛나는 배우다.


“피란살이 하느라 저는 초등학교를 네 군데나 옮겨 다녔어요. 하지만 어머니 덕에 힘든 줄 몰랐고, 학교 학예회 때마다 연극 무용 노래 같은 재능을 뽐내며 구김살 없이 자랄 수 있었죠. 제가 시집가던 해에 어머니는 쪽진 머리를 자르시더군요. 나중에야 어머니 마음을 알 수 있었어요. 그건 막내딸을 시집보내는 것으로 어미로서의 부채와 한을 마무리하는 일종의 의식이었죠. 저는 무대 위에서 어머니 흉내를 내고 있는 나를 느껴요. 어머니의 감수성과 서정, 그 집요함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역시 보통 딸들처럼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았다.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네 살 연하의 남편과 결혼한 것. 지난 72년 박정자가 친구의 남동생이며, 직업도 불분명한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겠다고 나섰을 때 어머니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고 한다. 그가 뜻을 꺾지 않자 보따리를 싸 두 번이나 집을 나가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은 결혼했죠(웃음). 나도 마찬가지지만, 어느 부모가 자식을 이기겠어요. 이제 제 딸이 그때 제 나이가 됐는데,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요. 이제야 조금씩 내 죄를 느끼는 거지. 엄마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가 정말 날 필요로 할 때 자주 찾아뵙지 못한 것도 마음 아프고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공연 무대 서는 배우 박정자

연극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한 장면.


박정자가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실감나는 ‘어머니’ 연기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은 그 역시 평범한 딸로서 어머니에 대한 이 같은 부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배우 박정자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은 지난 86년 초연된 연극 ‘위기의 여자’. 당시 마흔네 살이던 그는 동갑내기 주인공 모니크 역을 맡아, 평생 가족만 바라보고 살다 남편의 외도 앞에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혼란을 겪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생생히 그려냈다.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2백50회 동안 공연된 이 연극은 박정자에게 그해 백상예술대상, 동아연극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고, 동시에 그를 우리나라 중년 여성, ‘어머니’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여든 될 때까지 ‘19 그리고 80’ 연기하며 무대 위에서 물구나무서기 할 거예요”
그의 연기 이력에는 이 외에도 몇 개의 ‘어머니’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가운데 박정자가 가장 잊을 수 없는 역할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 연기했던 바보 온달의 어머니.
“업과 인연의 회오리에 휘말려 아들과 며느리를 다 잃고 홀로 남는 노모 역이죠. 마지막 장면이 참 좋아요. 다 죽고, 무대 위에 아무도 없는데, 노모가 마지막으로 독백을 하거든요. 눈이 오는군, 오늘은 산에서 자는 날도 아닌데, 왜 이리 늦는구….”
스스로 “연기를 안 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 배우는 순식간에 인터뷰 공간을 무대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박정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사를 읊으며 ‘그 여자 억척어멈’ ‘피의 결혼’ ‘굿나잇 마더’ 등 자신이 어머니 역할을 맡았던 작품들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동안, 기자는 어느새 객석 한가운데서 그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굿나잇 마더’를 연기할 때는 심신이 황폐해졌죠. 배우는 극중 역할이 실제 삶으로 쳐들어오거든요. 엄마와 딸, 단둘이 나오는 작품인데 딸이 엄마 앞에서 자살을 해요. 엄마는 오열하고…. 매일 내 앞에서 딸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이 작품을 공연하면서 아주 폭삭 늙어버렸어요.”
어머니 역이 그를 힘겹게 했다면, 박정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준 작품은 지금부터 꼭 10년 전 쉰 셋의 나이로 공연했던 ‘11월의 왈츠’다. 스무 살 연하의 청년과 사랑에 빠진 중년 여성의 독백으로 이뤄진 이 작품을 공연하는 동안 박정자는 좀 더 섹시하고 아름다워보이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빨간 드레스를 입으려고 난생처음 ‘올인원’도 입어봤다고. 신기한 것은 몸이 힘들수록 얼굴은 오히려 아름다워졌다는 것이다. 박정자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사랑을 할 줄 아는 배우, 사랑을 연기하는 배우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이때의 경험에서 깨달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 박정자에게 연극은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는 연극과 함께 성장해왔고, 그 안에서 한살 한살 나이를 먹었다. ‘위기의 여자’를 할 때 주인공과 같은 44세이던 이 배우는 나이 쉰이 되던 해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에 뛰어들었고, 62세 때부터는 ‘19 그리고 80’의 주인공 80세 괴짜 할머니 모드 역을 맡기 시작했다. ‘19 그리고 80’은 열아홉 살 총각이 여든 살 할머니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담은 연극. 박정자는 삶에 대한 지혜와 소녀다운 순수함을 함께 갖춘 할머니 ‘모드’를 연기하며 ‘나이듦’의 매력을 새롭게 깨달았다고 한다.
“예전에 했던 한 작품에서 ‘난 예순넷에 죽고 싶어’라는 대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는 그 나이가 까마득하게 느껴졌죠. 늙어가는 게 두렵기도 했고요. 하지만 ‘모드’를 알게되면서부터 한해 한해 나이 들어가는 내 모습이 자랑스럽고 기뻐요. 그래서 난 이 작품을 여든 때까지 해마다 공연하려고 해요. 내 삶에 있어 일종의 이벤트죠. 매년 다른 남자 배우를 캐스팅해서 관객들이 올해는 누가 박정자의 연인이 되나 궁금해하며 극장에 오게 만들 거예요. 정말 재미있겠죠?”
그런 박정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건강 문제다. 최근 그는 갑자기 찾아온 목 디스크와 오십견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한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에서 딸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연습하는데 갑자기 팔이 올라가지 않았던 것. 지금껏 건강만큼은 자신하며 살아온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게다가 ‘19 그리고 80’의 모드를 연기하기 위해서는 무대 위에서 물구나무도 서야 한다.
“제가 훌쩍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관객들이 너무 좋아하거든요. 그 장면은 모드의 젊음과 순수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 절대 뺄 수도 없고요. 그래서 요즘 열심히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어요. 저는 여든이 될 때까지 무대 위에서 물구나무를 설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박정자는 얼마 전 한 역술원에 아들의 결혼 날짜를 받으러 갔다가 슬쩍 “내가 여든까지 무대에 설 수 있겠느냐”고 물어본 적도 있다며 활짝 웃었다. ‘날짜 봐준 사람’의 답은 “여든한 살까지도 거뜬하시겠다”였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새로운 계획 앞에 마음 설레는 여자, 자신의 일에 모든 것을 던질 줄 아는 뜨거움과 주위 사람들에 대한 따뜻함을 함께 갖춘 여자. 그 여자 박정자가 여든까지 무대 위에 서기를 바라는 마음은 사실 박정자보다 우리가 더 크지 않을까.

여성동아 2005년 9월 50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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