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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이 사람의 삶

25년간 기지촌 ‘양색시’로 살다 기지촌 운동가로 변신한 김연자

”성매매는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해 생긴 마음의 병에서 비롯 전문적이고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해요”

글·구미화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5.08.02 18:22:00

김연자씨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동두천 기지촌에 들어가 송탄과 군산 아메리카 타운 등 기지촌에서 젊음을 소진했다. 미군에게 몸을 팔고, 술과 담배, 환각제에 찌들어 살았던 그가 25년 만에 ‘양색시’ 생활을 정리하고 늦깎이 신학생으로 변신, 환갑이 지난 나이에 기지촌 운동가를 자처하는 사연을 들어보았다.
25년간 기지촌 ‘양색시’로 살다 기지촌 운동가로 변신한 김연자

‘아메리카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다소 길고 시선을 끄는 제목의 신간 표지엔 미소 띤 미군의 눈빛을 뒤로한 채 머리에 헤어 롤을 말고 한손은 허리에 가볍게 얹은 한 여인의 빛바랜 사진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쓴 김연자씨(62)의 모습이다. 그는 12년 전부터 자서전을 쓰겠다고 별렀고, 책 제목은 그가 지인들에게 부탁해놓은 비문의 일부라고 한다.
‘정열적으로 열심히 산 여자, 죽는 순간 오분 전까지 악을 쓰고 열변을 토했던 여자 여기 묻히다’라는 비문을 부탁해놓았다는 그는 한 여성이 성매매를 그만두고 새 삶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리고, 성매매 여성들이 사회에 나와 부딪쳐보려 할 때 손가락질하거나 동정할 것이 아니라 그저 똑같은 한 사람으로 맞아주고 기다려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책을 썼다고 한다.
뒤늦게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어엿한 전도사가 되었지만 그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동두천 기지촌에 들어가 나이 쉰 살이 다 되도록 ‘양색시’ 생활을 했다. 수차례 기지촌을 벗어나려 애쓰고, 기지촌을 떠나 새 삶을 꾸린 적도 있지만 번번이 기지촌으로 되돌아왔다.
“그때는 희망이라는 게 없었어요. 성매매를 딜레마라고 하고, 늪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25년 동안 어떻게 그 생활을 계속했나 믿어지지 않지만 그때는 마음속으로는 벗어나고 싶어도 계속 그 주변을 맴돌게 되더라고요. 결혼해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 걸 보면 개인의 의지만으로 성매매를 근절할 수 있는 건 아닌가봐요.”
그는 “다른 성매매 여성들에게 돌을 맞을지언정 성매매는 정신질환이라고 단정 짓겠다”고 말한다.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해 생긴 마음의 병, 모질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앓게 된 중병이라는 것. 그는 “같은 일을 했던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저마다 어릴 적에 성폭행을 당했다든지 하는 아픔들을 갖고 있더라”며 “그래서 더 기지촌과 성매매 문제는 동정과 연민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전문적이고 장기적인 치료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 역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누구에게도 말 못한 성폭행 경험 때문에 유년 시절 내내 속병을 앓았다고 털어놓았다.
여수에서 이름난 여수여고에 입학해 니체, 알베르 카뮈,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고, 불안 불신 부조리 존재 절망 같은 말들을 읊어대던 꿈 많은 여고생이었던 그는 11세 때 먼 친척 오빠로부터 당했던 불쾌한 경험이 자신을 남과 다르게 만드는 치욕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고2 여름방학 때 또다시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했지만 혼자서 생계를 꾸려가던 어머니는 그의 상처를 감싸주기에는 너무 바빴다. 결국 상처가 곪아 터졌고, 그는 졸업을 두 달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초등학교 시절 성폭행 피해 경험으로 속병 앓아
다행히 일찍 결혼한 중학교 친구 남편의 소개로 한신문사 여수 지사에 수습기자로 취직했지만 이미 세상만사를 보는 눈이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진 그는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방탕하게 생활했다. 그러다 유부남의 아기를 임신하고, 낙태하는 뼈아픈 경험을 한 뒤 죄책감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살 기도가 실패하자 그는 홀로 상경했는데 그때가 62년, 그의 나이 스무 살이었다.

25년간 기지촌 ‘양색시’로 살다 기지촌 운동가로 변신한 김연자

김연자씨는 아흔이 넘은 어머니와 단둘이 지낸 최근 몇년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누가 옆에서 뭐라고 말을 해주고, 같이 얘기하고 이끌어줬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랐는데 주위에 사회를 가르쳐주고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는 결국 양동 판자촌 쪽방에서 지내며 책 외판원, 버스 차장, 구두닦이 등을 전전하다 그 이듬해 대방동에 있는 서울시립부녀보호소에 들어갔다. 공짜로 먹여주고, 이·미용 기술도 가르쳐준다는 말에 솔깃하기도 했지만 양동 판자촌에 오래 있다간 사창가로 팔려가기 십상이라는 이웃의 말에 덜컥 겁이 났기 때문. 그런데 결과적으로 몸을 팔게 될까 두려워 찾아간 시립부녀보호소가 그를 성매매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역할을 했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이 정책적으로 운영한 부녀보호소는 말로는 보호소였지만 수용소나 매한가지였다. 도동·양동·종로3가의 사창가에서 성매매를 하던 여성들이 잡혀와 강제로 수용되는 곳이었으며 한남동, 이태원 등에서 미군들을 상대하던 여자, 거리에서 몸을 팔던 여자들부터 고급 콜걸까지 많은 성매매 여성들이 모여 있었다는 것. 부녀보호소 안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생활하며 그는 점차 몸 파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두려움도 점점 없어졌다고 한다. 자유분방한 생활이 오히려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고.
“종일 걸으며 책을 팔고, 코피 쏟으며 버스 차장을 하고, 남들 눈치 보며 구두닦이를 할 때는 사회생활이 몹시 고달프고 희망이 없었는데 이 새로운 삶은 자유롭고 풍족하며 쉽고 편해 보였어요. 거기에 어떤 함정이 숨어 있는지 짐작도 못하고 그들의 생활에 이끌렸던 거죠.”
보호소에 처음 들어가던 날, 기술을 배워 떳떳하게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그 이듬해 부녀보호소를 나올 때 막막하기만 했다. 몇 개월간 이용기술을 배웠지만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 그는 결국 보호소 시절 한 여자가 건넨 쪽지에 적힌 동두천 주소지로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사회가 나를 받아주지 않은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언젠가부터 의욕도 없고 사람이 옆에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고 뭐든 금세 싫증을 느꼈던 것 같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가 ‘눈 딱 감고 고생해서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결심하고 찾아간 곳은 미 육군 부대 인근의 기지촌이었다. 그는 ‘큰 엄마’ ‘작은 엄마’가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다. 밤에 미장원에서 머리를 단장하고, 화장을 곱게 한 다음 골목으로 나와 “쉬었다 가세요” “놀다 가세요” 하며 남자의 옷깃을 잡아끄는 것이 그의 첫 임무였다. 수치심에 처음엔 입 밖에 나오지 않던 말들도 하루 이틀 더해가니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지만 맨정신으로 저녁마다 일을 치르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아 결국 초저녁부터 술을 마셨고, 정 힘들 때는 수술환자들 진정시킬 때 먹인다는 ‘세코날’을 먹기도 했다.

초저녁부터 술 마시고 호객행위 고향 가는 길 아득히 멀어져
당시 동두천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미군 부대가 들어서면서 기지촌이 형성돼 클럽의 불빛과 시끄러운 음악으로 한밤중에도 대낮같이 환했다고 한다. 처음 동두천에 들어갔을 때 거리에서 남자를 호객해 몸을 팔았던 그는 몇 년 뒤 클럽에 들어가 ‘양색시’가 되었다.
“동두천 기지촌에는 거의 4천 명이 넘는 여자들이 있었어요. 클럽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2천 명, 거리에서 미군들을 불러 몸을 파는 여자들이 2천 명쯤 되었죠.”
기지촌 한 곳에 그렇게 많은 성매매 여성들이 밀집해 있다보니 그들 사이에 잦은 다툼이 벌어졌다고 한다. 클럽 여자들은 미군들을 상대로 돈을 벌고 있기는 하지만 검진 카드도 있는 어엿한 직업인이라며 거리의 여자들을 무시했고, 거리의 여자들은 “그래도 우리는 자유롭게 일한다”며 맞받아쳤다고. 또 흑인을 상대하는 여성과 백인을 상대하는 여성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졌고,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몸을 파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 여성 사이에도 갈등이 있었다.

25년간 기지촌 ‘양색시’로 살다 기지촌 운동가로 변신한 김연자

동두천에서 처음 기지촌 생활을 시작해 7년을 지낸 그는 미 7사단이 본국으로 떠나자 먹이를 찾아 떠나는 철새처럼 몇 명의 무리와 함께 또 다른 기지촌인 송탄(평택)으로 향했다. 송탄에서 5년을 지낸 뒤엔 다시 군산 아메리카 타운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기지촌 여자들 모두가 그러하듯 미군들을 상대했던 몸으로 고향에 돌아간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 세월이 지날수록 고향 가는 길은 더 아득해졌다”며 씁쓸해했다.
동두천, 송탄, 군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기지촌에서 젊음을 보낸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과거 정부의 기지촌 정책이 얼마나 모순적이었는지 놀라게 된다. 대한민국은 윤락행위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나라다. 이 사실은 김씨가 기지촌 여성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다름없지만 그는 정부가 발행하는 ‘검진증’이 있어야 ‘영업’을 할 수 있었고, 매주 한 번씩 일반 산부인과에 위탁을 준 성병 진료소에서 검진을 받았다. 성병이 있다고 판정되면 ‘몽키 하우스’라 불리는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는 “미제 수용소에서 범죄자 취급을 받으며 날마다 미군들에게 검사받는 일이 수치스러웠다”고 고백한다. K-55 미 공군 부대가 있던 송탄에서는 자주 교양강좌가 열렸는데 그때마다 군수, 경찰서 보안과장, 군청 복지과장 등이 참석해 성매매 여성들을 숨은 애국자라 치켜세우며 용기와 긍지를 갖고 달러 획득에 기여함을 명심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성매매 여성들은 ‘외화벌이’를 위해 미군들의 훈련지까지 따라가기도 했다. 동두천과 인근의 주내, 의정부, 파주 등에 주둔하는 7사단 소속의 미군들이 야전 훈련을 나가면 기지촌 여성들 사이에는 ‘담요 부대’가 결성됐던 것. “한 달에 한두 번 7사단이 산으로 훈련을 갈 때마다 미리 정보를 얻은 포주가 클럽에 연락을 해와요. 그러면 국방색 담요를 들고 어딘지도 모르고 포주들이 가는 대로 따라가는 거예요. 농가에 합숙을 하고 있다가 밤에 나가서 작은 불빛으로 깜빡깜빡 신호를 보내면 군인들이 알고 와요. 그러면 솔잎 위에 담요를 깔고 일을 치르는 거죠.”
오 달러, 십 달러…. 클럽에서 버는 돈보다는 많았지만 절반을 포주가 챙겼고, 나머지 중 일부는 클럽 주인의 몫이었다. 결국 여성들에게 떨어지는 돈은 몇 푼 되지 않았던 것. 60년대 ‘담요 부대’는 70년대 팀스피리트 훈련지 ‘임시 기지촌’으로 이어졌다. 예천 공군 부대 앞에 천막을 치고 임시 클럽을 만들어 영업을 하기도 하고, 농가의 빈방을 빌려 미군들을 상대하기도 했다. 여자들이 전국에서 몰리다 보니 성병 검진을 위해 보건소 직원들이 파견까지 나왔다고 한다. 김씨는 “그곳까지 모여든 여자들도 대단하지만 정부도 참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동료 여성 무참히 살해한 미군에 대한 무기징역 선고 이끌어내
처음 동두천을 찾았을 때 몇 해만 고생해서 돈을 모아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그는 동두천에서 7년, 송탄에서 5년을 지내고 76년 군산 아메리카 타운으로 내려갔다. 동두천이나 송탄에서의 생활도 쉽지 않았지만 특히 군산에서 그는 가슴 아픈 일을 많이 겪었다. 동료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숱하게 지켜봐야 했던 것. 그중에서도 77년 여름 무참하게 살해된 동료의 죽음은 지금도 그를 가슴 아프게 만든다고 한다.
“발가벗겨진 영순이는 칼에 찔려 유방 사이가 푹 파이고, 배꼽도 칼에 찔려 있었어요. 입에는 휴지가 한 무더기 박혀 있고, 꼭 쥔 주먹 안엔 체모가 한 움큼 잡혀 있었죠.”
아메리카 타운을 발칵 뒤집은 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건 스티븐이란 미군이었다. 스티븐은 그보다 한 달 앞서 한 성매매 여성이 자신의 방에서 불에 타 목숨을 잃었을 때도 아메리카 타운 여성들에게 범인으로 지목됐으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었다. 기지촌 여성들이 이번엔 절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군산 공군 부대 앞에 몰려가 밤새워 농성을 벌였다. 마침내 군산경찰서장이 나타나 명예를 걸고 사건을 규명하겠다는 약속을 했고, 미 공군 1중대 소속 스티븐 타워맨은 피의자로 기소되었다. 김씨는 법정에서 무참히 죽은 두 여성을 대신해 증언했고, 마침내 무기징역형을 이끌어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은 92년 윤금이 살해사건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67년 한·미 협정을 맺은 이후 한국 법정에서 처음으로 미군 범죄에 무기징역형을 선고한 첫 판결은 77년 군산에서 이복순과 이영순이 죽은 후, 아메리카 타운 여자들이 이끌어낸 것이었다”고 말한다.

25년간 기지촌 ‘양색시’로 살다 기지촌 운동가로 변신한 김연자

그렇게 동료들이 억울하게 죽어나가자 그는 초조하고 불안해졌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살아온 길을 용서해달라고, 제발 구해달라고 매달리고 싶었다는 그는 화장품을 팔러 타운에 자주 드나드는 집사에게 애원해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다른 동료들도 하나 둘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자 그는 자신들만의 교회, 이상하게 쳐다보는 이가 없어 동료들이 제집처럼 드나들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그러면서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싹텄다.
86년 그는 마침내 동료들과 함께 타운 바로 옆에 있는 땅 1백47평을 사서 기지촌 여성들이 직접 각목을 자르고, 망치질을 하고, 장판을 주워다 지붕을 만들어 그들만의 천막 공동체를 완성했다. 그는 “목사도 전도사도 십자가도 연단도 없었지만 내 평생 보아온 가장 아름다운 교회였다”고 회상했다. 그곳에서만은 타운의 여성도, 시집갔다 실패하고 돌아온 왕년의 기지촌 여성도, 혼혈아를 낳고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는 여성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웃고 떠들 수 있었기 때문. 천막생활을 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술과 담배에서 멀어졌고 클럽 일도 정리할 수 있었다. 동료들이 미군과 결혼하고, 학교나 학원에 다니며 새 삶을 준비하자 그는 88년 전북신학교에 입학했다. 뒤늦게 시작한 공부가 쉽지 않았을 듯한데 그는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고, 건드리려 하지 않는 기지촌 여성들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선 전도사라는 직함이 꼭 필요했다고 말한다.
“영어는 순전히 제 실력을 평가받았지만 사실 나머지 과목은 모두 커닝으로 시험에 통과했어요. 하지만 지금도 그때 커닝한 것에 대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요. 전 솔직히 성직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도사’라는 직함이 있어야 사회와 맞부딪치고, 발언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신학교에 입학했거든요.”

기지촌 여성들과 혼혈아들을 위한 지원 센터 만드는 것이 마지막 꿈
군산 아메리카 타운이 차츰 축소되고, 동료들도 하나 둘 떠나가자 그는 미군 부대 규모가 커진 송탄으로 옮겨와 수원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신학교 시절엔 크리스천 하우스를 열어 혼혈아들에게 공부방을 제공했고, 졸업 후에는 참사랑선교원을 세우고 혼혈아들과 기지촌 여성들을 도왔다. 그가 바라던 대로 ‘기지촌 여성 출신의 전도사’라는 그의 독특한 이력은 사회의 관심을 불러모았고, 기지촌 문제를 연구하는 학생, 교수, 작가, 사진가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들을 도우면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고, 기지촌 여성과 혼혈아들을 위한 실질적인 대책이 나올 수 있을 거라 기대했어요. 천막공동체 시절을 떠올리며 어렵게 사는 기지촌 여성들과 혼혈아들을 위한 징검다리가 되기를 바랐는데 실질적으로는 주변에서 ‘김연자가 전도사가 되더니 이상한 사람들과 일한다’며 손가락질하고,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미군과 기지촌의 문제점들을 학문적으로 접근할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어요.”
그는 결국 참사랑선교원을 개원 3년 만에 문 닫았고, 다시 술과 담배에 의지하며 정신적으로 방황했다. 7년 넘게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90세가 넘은 어머니를 돌보며 집안에만 머물러 있던 그가 자서전을 펴내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온 건 그때 그 시절 ‘연자’라는 여자가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도 사회와 화해하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책을 “한 여자가 성폭력을 당하고 어떻게 평생을 방황하며 살다가 치유되는가의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그는 60평생을 헤맨 끝에 지난 몇 년간 오로지 어머니와 지내면서 상처를 직시하고, 또 어머니에게 드러내 보이면서 비로소 치유될 수 있었다며 다른 성매매 여성들도 거기에서 벗어나 아픔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바깥세상과 만나며 긴 시간에 걸쳐 치유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전직 기지촌 여성이나 목회자가 아닌 ‘기지촌 운동가’로 지칭하는 김연자씨. “참사랑선교원을 운영하며 잃은 것도 많지만 시행착오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도 깨달았고, 이젠 지식인들을 선의적으로 이용할 줄도 안다”는 그는 다시 기지촌 여성과 혼혈아를 위해 일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기지촌 여성과 혼혈아 문제는 누가 누구를 돕는 차원의 것이 아니에요. 93년에 참사랑선교원을 개원했을 때만 해도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와서 아이를 돌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요즘 기지촌 여성들은 혼혈아를 낳지 않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거의 없고, 참사랑선교원을 운영할 당시 어린아이들도 지금은 청소년이나 성인으로 자라 그들을 선교하는 것이 쉽지 않죠. 혼혈아와 혼혈아 엄마에 대한 지속적인 상담과 심리 치료, 자립을 위한 지원 등이 병행되어야 해요.”
용산에서 평택으로 그는 미군기지 이전이 완료되면 군인가족과 기지촌 성매매 여성, 혼혈아를 키우는 미혼모들이 섞여 살아야 한다며 그때를 대비해 기지촌 여성들과 혼혈아들을 지원하는 센터를 설립하는 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명이라고 말했다.

여성동아 2005년 8월 5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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