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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노동부 차관보 전신애

“결혼 10년 만에 친정 아버지께 용서받은 말못할 지난 아픔, 두 아들 남다른 평등교육, 40년 부부 사랑의 지혜 첫 공개”

글·최호열 기자 / 사진·매일경제, 여성가족부 제공

입력 2005.08.02 17:33:00

한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 행정부 최고위급 관료인 노동부 차관보에 오른 전신애씨. 평범한 전업주부의 삶을 꿈꾸던 그가 동성동본 남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두 아이를 키우다 뒤늦게 사회활동에 뛰어들어 화려한 성공을 거두기까지 남다른 인생과 부부사랑을 들려주었다.
미국 노동부 차관보 전신애

1965년 9월15일 김포공항 출국장, 젊은 여성 한 명이 어머니와 언니를 부둥켜안고 목 놓아 울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던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탈진한 그는 결국 승무원의 등에 업혀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결혼이 불가능했던 동성동본 남자를 사랑한 그 여성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 가족과 조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떠나는 길이었다.
40년 후, 지난 7월5일부터 8일까지 열린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그 여성에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그가 바로 재미 한인 여성으로는 최고 관직에 오른 전신애 미 연방정부 노동부 차관보(62)다. 한인 여성의 위상을 한 단계 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그를 행사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호주제 폐지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저예요. 남편과 저는 동성동본이라 혼인신고를 할 수 없었거든요. 물론 편법으로 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런 게 싫어 아직도 한국 호적에는 미혼으로 돼 있어요. 용기 있는 한국 여성들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게 된 거죠. 거기에 보답하는 길은 저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해 이번 행사에 참여하게 됐어요.”
89년 일리노이주 사상 최초의 동양계 장관, 2001년 재미교포 여성 최초 미 연방정부 차관보…. 백인 중심의 미국사회에서 이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면 외모에서부터 말투까지 뭔가 남다를 것 같았는데 인터뷰 내내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이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그는 뜻밖에도 젊었을 때 자신이 미국 정부 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고사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것조차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에 다닐 때도 ‘여자가 시집 잘 가면 그만이지’ 하며 공부를 등한시했을 정도였다고.
하지만 남편과의 만남은 평범한 전업주부의 삶을 꿈꾸던 그의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오빠 친구로 그와 동성동본이었던 남편 전경철씨(69·아르곤연구소 연구원)와 열렬한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다. 당연히 결혼을 반대한 그의 아버지는 직접 다른 혼처까지 정해놓았다고 한다.
“그땐 제가 참 단순했어요. 사랑을 위해 앞뒤 잴 것도 없이 유학 가 있는 남편을 쫓아 미국으로 건너가 한 달 만에 결혼을 했으니까요(웃음). 아버지는 몇 달 후에야 그 사실을 알았을 만큼 온 식구들이 비밀로 했어요. 그 일로 어머니가 큰 곤욕을 치르셨죠. 2년 후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한국에 왔는데 아버지는 저를 안 보려고 집에 들어오지도 않으셨어요. 10년이 지나서야 용서를 하셨죠. 그때도 처음엔 노여움을 풀지 않으시다가 두 외손자의 재롱에 결국 마음을 여셨어요.”

두 아이 키워놓고 뒤늦게 사회생활 시작

미국에서 가난한 유학생의 아내로 평범하게 살던 그의 인생에 또 한 번의 변화를 일으킨 이도 남편이었다고 한다. 장남 토비를 임신했을 때인 69년 봄, “미국에서 살고 미국을 알려면 학교에 가는 것이 상책”이라며 자기가 돈을 더 벌어 학비를 댈 테니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권한 것.

미국 노동부 차관보 전신애

“전 공부에 뜻이 없어 싫다고 했죠. 남편에게 ‘친구들의 아내가 대학원에 다니니까 내가 부끄럽냐’며 화를 내기도 했어요. 그래도 남편이 고집을 꺾지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나중에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협박을 하면서(웃음).”
2년 후인 71년, 그는 둘째 아들 그레그를 임신한 상태에서 노스웨스턴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곧바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전 둘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까지 5년여 동안 일을 갖지 않았어요. 유학생 부부라 가난하긴 했지만 엄마 노릇을 하는 게 좋았거든요. 전 지금도 양육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어요.”
둘째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76년, 그는 처음으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여자도 자기 자신에 만족해야 더 나은 아내나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도 전 엄마로서의 본분을 최우선에 두었기 때문에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킨 후 출근해도 되는 직장을 찾았어요. 그 과정에서 좋은 직장을 많이 놓쳤지만 후회는 없어요.”
그가 들어간 곳은 이중언어 교육센터였다. 여기에서 일하며 그는 제3세계 이민자들이 문화적 차이로 인해 겪는 문제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이를 계기로 교사들이 미국과는 문화적 특성이 전혀 다른 제3세계 이민 학생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훈련과정을 개발했다. 또한 자연스럽게 소수민족 여성과 취업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65년부터 아시아 이민자가 급증하면서 학교 적응 문제와 취업 문제가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했어요.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각개전투를 벌이기보다는 중국과 일본, 한국이 뭉친다면 미국 내 영향력도 커질 것이라고 판단하고 동맹 체제를 구축하는 데 앞장섰어요.”
고군분투하며 일리노이 주정부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다 82년 주지사의 아시아계 미국인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84년에는 아시아계 미국인 업무를 담당하는 주지사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89년엔 일리노이 주정부 금융규제부 장관에 임명돼 주정부 사상 최초의 동양계 각료가 되었고, 91년부터는 노동부 장관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주지사로부터 장관직을 제의 받고 일주일 동안 고민을 했어요. 당시 대학생인 두 아들의 교육비와 우리 부부의 노후를 위해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때 남편이 ‘돈은 내가 벌 테니 당신은 큰일을 하라’며 등을 떠밀었어요. 제가 결혼 후 남편 말을 딱 세 번 들었는데, 첫 번째가 대학원 간 거였고, 두 번째가 이때였어요. 마지막은 연금저축을 하는 문제였고요(웃음).”
10년여 동안 일리노이주 장관으로 일한 그는 2000년 대선 때 공화당 캠프에서 공약개발팀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2001년 미국 노동부 여성국 담당 차관보에 임명됐다. 또한 노동부의 효율화에 대한 기여와 능력을 인정받아 부시 2기 행정부에서도 연임되어 일하고 있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미국 공직사회에 진출해 성공한 비결이 뭘까. 이에 대해 그는 명쾌하게 말한다.
“내가 맡은 분야에만 집중하는 것, 그리고 베스트 아이디어를 내는 거죠. 미국 공무원들도 종종 성공비결을 물어오는데, 솔직히 그들에겐 마음에 없는 소리도 가끔 해요. 좋은 시기에 좋은 상관을 만나 좋은 아이디어를 내게 되었노라고(웃음).”

일에 대한 그의 열정은 놀라울 정도다. 스스로도 지난 4년 동안 무섭게 일을 했다고 말할 정도. 환갑이 넘었지만 그는 지금도 밤에 3시간만 잔다. 부족한 잠은 오후에 2시간 정도 낮잠으로 보충한다고. 젊은 사람도 지칠 법하건만 그는 오히려 “아이디어는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주로 나온다”고 말한다.
“소수민족 여성으로서 미국 주류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느냐고요? 당연히 무시당했죠. 이를 극복하려면 재능만 갖고는 안 됩니다. 저는 늘 당당함을 보이려 애썼어요. 저는 아시아계 후배 여성들에게 항상 ‘처음 보는 미국인들에게 인사할 때 절대 상체를 굽히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동양에선 그게 당연한 예절이지만 미국인들은 자기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그런다고 생각해 무시하거든요.”
자신의 아이디어 남에게 뺏긴 적 많지만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아
미국 노동부 차관보 전신애

전신애씨는 지난 4년 동안 하루 5시간씩 자며 무섭게 일했다고 한다.


그는 일을 하면서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견제를 받기도 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나 성과물을 남에게 빼앗긴 적도 많았지만 그로 인해 분노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아이디어 6개를 다른 사람에게 주더라도 그 사람으로부터 그 절반의 도움을 받으면 손해가 아니라는 마음가짐을 가졌기 때문. 그런 여유가 오늘의 그를 있게 했는지 모른다.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남편에게 툭 하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어깃장을 놓곤 했어요. 하지만 전 가족까지 등지고 온 거였잖아요.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이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살아야 한다는 마음의 배수진을 친 것이 오늘의 저를 만든 것 같아요.”
남편 전경철씨는 지금도 매일 아침 피곤해서 한쪽 눈이 감기더라도 아내를 위해 커피를 탄다고 한다. 또한 “일 욕심을 부리기에 앞서 건강부터 챙기라”며 꼬박꼬박 영양제를 챙겨준다고.
“사람들이 우리를 이상적인 부부라고 부르는데 그건 아니에요. 남편과 제가 서로에게 잘 하는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기 때문이에요. 배우자에게 뭘 기대하면 안돼요. 자식도 마찬가지고요. 기대가 없으면 화를 낼 이유가 없잖아요. 물론 우리도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예를 들어 남편이 생선회를 무척 좋아하는데 저는 생선 만지는 걸 싫어하거든요.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남편이 기대를 포기하고 직접 칼을 들어야 했죠. 남편은 부엌일을 잘해요. 그걸 보고 자라서인지 아이들도 부엌일을 잘하고요.”
그는 지금도 아이들이 집에 오면 꼭 부엌일을 시킨다고 한다. 여성이 사회에서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집안일에서부터 가족의 협력, 특히 남자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묘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고 한다.
“토비가 며느리를 처음 우리 부부에게 인사시키려 집에 데리고 왔을 때예요. 저에게 ‘엄마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딸이 생겼다고 생각하라’고 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았죠. 그런데 저녁을 먹은 후 자기 와이프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할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거예요. 아버지를 닮아서 그렇구나 싶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론 섭섭하기도 하더라고요. 엄마가 설거지하는 것은 맘이 안 아프고 마누라가 하는 것은 신경이 쓰이나 싶어서요(웃음).”
내친김에 그는 며느리로부터 들었다며 아들 자랑을 덧붙였다.
“며느리도 재미교포인데, 토비와 사귀기 전에 여럿이 함께 영화구경을 간 적이 있대요. 팝콘을 산 후 콜라를 사기 위해 줄을 서고 있는데 그걸 본 토비가 다가와 ‘내가 도와줄까?’ 하더래요. 그때 한국 남자치고 괜찮다 싶어 만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내가 자식을 잘 키웠구나 싶어 뿌듯했죠.”
여자에게 먼저 “내가 도와줄까?” 하고 묻는 남자가 되도록 아이들을 교육시켰다는 그는 또한 아이들이 자립심을 가지도록 키웠다고 한다. 부모가 뭐든 해결해주면 아이들은 발전이 없다는 것.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할 때 지도력, 지구력, 창의력이 생긴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일까. 첫째 토비는 지금 변호사로, 둘째 그레그는 영화음악 작곡가로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노동부 차관보 전신애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 보여주는 게 가장 훌륭한 자녀교육

그는 끝으로 한국의 주부들에게 “무엇이든 자신의 일을 갖고, 그 일을 열심히 하라”고 충고했다. 엄마가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이들에게 가장 훌륭한 교육이라는 것.
“내가 직장에 다니니까 아이들이 독립심이 생기고, 엄마를 존경하게 되더라고요.”
“자기 일을 갖는 것은 자녀교육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한 그는 “직장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파트타임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도전하라”고 권했다.
“저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편 하나만 바라보고 미국에 갔잖아요. 그런데 첫 생일에 남편이 꽃도 안 사주는 거예요. 그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이런 사람을 보고 내가 미국까지 왔나 하는 생각도 들고. 다음 해부터는 제가 먼저 꽃을 사달라고 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저에게 꽃이 필요 없어졌어요. 직장이 생기니까 일이 재미있고, 능력을 인정 받으면서 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 생기니까 꽃이 문제가 아니더라고요.”
그는 자기 일을 가지라는 말이 꼭 직장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현 미국 영부인 로라 부시도 직장을 가지지 않았지만 많은 미국인들이 존경할 정도로 지금까지 누구보다 훌륭한 일을 해왔다는 것.
“직장이든 무엇이든 ‘일을 한다’는 걸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발휘하는 장으로 생각해야 해요. 그래서 일을 하며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면 행복지수도 올라가요. 행복한 사람이 남을 배려할 여유도 생기는 법이고요. 결국 주부들이 행복해야 가정과 사회가 행복해질 수 있는 거예요.”
그의 말은 차분했지만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여성동아 2005년 8월 50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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