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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방송 출연 그후

홍석천 “커밍아웃 뒤 고통스런 시간 날 지켜준 부모님의 사랑”

”힘겨울 때마다 늘 저를 든든히 지켜주시는 부모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글·송화선 기자 / 사진·조영철 기자

2005. 08. 02

지난 2000년 국내 연예인 가운데 최초로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힌 후 방송에서 퇴출당하는 등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던 탤런트 홍석천. 그가 최근 부모와 함께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밝혀 눈길을 끌었다. 홍석천을 만나 힘든 시절 그를 지켜준 부모의 사랑과 방송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숨겨진 가족사에 대해 들어보았다.

홍석천 “커밍아웃 뒤 고통스런 시간  날 지켜준 부모님의 사랑”

지난7월 중순 서울 용산구 이태원에서 홍석천(35)이 운영하는 카페 ‘아워 플레이스(Our Place)’를 찾았을 때 그는 다소 피곤해 보였다. 바로 며칠 전까지 가게 확장공사를 하느라 직접 페인트를 칠하고 인테리어를 바꾸는 등 분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녹초가 된 듯한 몸과 달리 기자를 바라보는 눈빛만은 반짝반짝 빛났다.
“얼마 전 부모님과 함께 아침 방송에 나가서 커밍아웃 이후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거든요. 그걸 보고 저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는 사람들이 많아요. 지금까지는 자기들과는 뭔가 다른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우리 부모님을 보니 너무 평범해서 친근감이 느껴진다는 거죠.”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당신도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사람’이라는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 무척 기쁜 듯했다.
홍석천은 지난 2000년 언론을 통해 ‘남자를 사랑한다’고 밝힌 뒤 한동안 방송활동의 제한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 6개에 고정 출연하고 있던 그는 갑자기 모든 프로그램에서 ‘쫓겨났고’ 사람들은 등 뒤에서 수군거렸다.
홍석천은 늘 “동성애자는 당신 주위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외쳤지만, 사람들은 그에게서 자기와 다른 모습을 찾기에만 바쁜 듯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햇빛에 그을린 얼굴, 굵은 손마디와 수줍은 미소를 지닌, 시골 어느 마을에서나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촌로의 모습을 한 어머니 아버지가 방송을 통해 얼굴을 비치면서 그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 같다고 말했다.
홍석천 “커밍아웃 뒤 고통스런 시간  날 지켜준 부모님의 사랑”

홍석천의 어머니는 아들이 커밍아웃 후 방송에서 퇴출당하고 주위 사람들의 냉대로 마음고생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그의 손을 꼭 잡고 말없이 다독거렸다. 그가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쏟자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느냐”며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내 아들이 더 이상은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해 보는 이들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했다.
세상 여느 모자 사이와 다를 바 없는 이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새삼 홍석천이 ‘동성애자’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 방송사 홈페이지에는 “홍석천씨, 꼭 어머니께 효도하십시오”라는 격려성 댓글이 잔뜩 올라왔고, 오가며 만나는 이들도 그에게 따뜻한 인사를 건넨다고 한다.
“어려운 자리였을 텐데 자식을 위해 기꺼이 나와주신 부모님께 뭐라 말씀드릴 수 없을 만큼 감사하죠. 제가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부모님은 저를 위해서라면 늘 뭐든지 해주시는 분들이에요.”

“집안의 기둥으로 대접하며 키워주신 부모님, 아들의 동성애자 고백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려”

지금은 독특한 헤어스타일과 남다른 패션 감각으로 어디서나 튀는 그지만, 어린 시절 홍석천은 반듯한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충남 청양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홍석기씨(70), 포목점을 운영하는 어머니 김순겸씨(70)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1등을 도맡아 할 만큼 공부를 잘했다고. 글짓기, 미술, 노래 등 다른 분야에서도 다양한 재능을 보이자 홍석천의 부모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그를 대전의 고등학교로 유학시켰다고 한다.

홍석천 “커밍아웃 뒤 고통스런 시간  날 지켜준 부모님의 사랑”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자신에게 기울였던 각별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다 홍석천은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가족사를 털어놓았다.
“제가 2녀2남의 막내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3녀1남의 막내, 외아들이거든요. 형은 저와 어머니가 다르고요. … 오래 전 일이니까 지금으로선 잘 이해할 수 없지만, 어머니가 결혼한 뒤 딸만 내리 셋을 낳으니까 할머니가 소박을 놓으셨다고 해요. 그러고는 아버지께 어떻게든 아들을 낳아 오라고 성화를 하신 거죠.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다른 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형이에요. 그런데 형이 태어나고 일년 만에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 제가 생겼대요. 결국 제 덕에 어머니는 다시 집에 들어오실 수 있게 됐죠. 형은 한동안 다른 집에서 친어머니와 함께 살았고요. 그래서인지 전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 같아요. 늘 ‘집안의 기둥’ 대접을 받았죠. 큰누나가 고등학교 때 병으로 세상을 떠서 지금은 누나가 두 명인데, 누나들도 하나뿐인 남동생을 끔찍이 위해줬어요.”
모든 부모가 그렇겠지만, 특히 홍석천의 어머니가 막내아들에게 쏟는 정성과 사랑은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종교처럼’ 그를 믿고 의지하는 어머니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홍석천도 이를 악물고 모범생으로 살았다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술 담배 당구 등에 손을 댄 적이 없고 성적도 늘 반에서 2~3등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가 대학 진학 후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된 뒤에도 한동안 커밍아웃을 망설였던 것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부모에게 너무 큰 충격이 될 것 같아서였다고.
“사실 언론에 커밍아웃하기 2년 전 큰누나한테만 먼저 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식구 중에 누군가는 저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그런데 누나가 몇날 며칠을 계속 울더라고요. 결국은 절 이해해줬지만, 대신 ‘엄마 아빠는 네 얘기를 들으면 쓰러지거나 돌아가실지도 모른다. 부모님 살아계시는 동안 만큼은 제발 비밀로 하라’고 신신당부했죠.”
홍석천도 처음에는 누나 말대로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제일 큰 고민을 말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고. 서른 살이 되자 ‘나이가 들수록 커밍아웃은 점점 더 어려워질 텐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더 늦기 전에 진실을 이야기하자’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서른이 되던 해인 지난 2000년 자신의 성 정체성을 솔직히 털어놓는 인터뷰를 했다.
홍석천 “커밍아웃 뒤 고통스런 시간  날 지켜준 부모님의 사랑”

세상에서 가장 든든히 지켜주는 아버지와 함께.


“지금도 후회되는 게 부모님께 먼저 말씀드리지 않고 언론 보도를 통해 아시게 만든 거예요. 인터뷰할 때는 홀가분했는데 막상 집에 돌아오니 기사를 읽고 제 이야기를 알게 될 부모님이 걱정되더라고요. 전화로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께 ‘엄마 아빠, 나 인터뷰 하나 했는데, 각오 좀 하셔야 될 거예요’라고 말씀드렸죠. 무슨 인터뷰냐고 물으시기에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했어요’라고 했어요. 그런데 어머니 아버지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모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내일 신문 보면 아들이 호모 새끼라고 나올 것’이라고 얘기했더니, 그 새벽에 부랴부랴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홍석천은 “평소 내가 잽이라도 좀 날렸다면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지 않으셨을 텐데, 실수 한 번 없던 아들이 갑자기 핵 펀치를 날렸으니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어하셨겠느냐”며 마음 아파했다. “도대체 남자가 어떻게 남자를 사랑하느냐”며 혼란스러워하던 부모는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럽던 아들이 갑자기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대상이 됐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이미 5년이 된 일이지만, 당시를 떠올리는 것은 여전히 홍석천을 고통스럽게 하는 듯했다. 스스로의 의지로 당당히 밝힌 커밍아웃인데도, 그에게 닥쳐온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홍석천 “커밍아웃 뒤 고통스런 시간  날 지켜준 부모님의 사랑”

“골목을 돌아가면 저 편에서 돌이 날아오는 게 아닐까 걱정해야 했어요. 사람들은 저한테 뻔히 들리게 ‘쟤 호모라며?’라고 수군거렸고, 제가 사는 아파트 현관문 옆에 ‘남자랑 자는 새끼, 더러운 새끼’ 같은 욕설이 써 있기도 했죠.”
그 무렵 너무 많이 변해버린 현실에 고통스러워하는 홍석천을 든든하게 지켜준 건, 그의 고백을 들은 뒤 “차라리 우리 다 같이 죽어버리자”며 눈물 흘리던 어머니 아버지였다고 한다.
“커밍아웃 인터뷰를 하고 나서 전 바로 호주 시드니로 올림픽 선수단을 응원하러 떠났어요. 예정된 일정이었거든요. 시드니에 있는 동안은 커밍아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고 지냈는데, 귀국해 인천공항에 들어오는 순간 한국 상황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죠. 기자들 수십명이 절 기다리고 있고, 공항이 온통 난리더라고요. 그런데 그들 사이로 아버지가 보였어요. 혹시라도 제게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 절 지켜주러 나오신 거죠. 커밍아웃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제발 마음을 돌리라’며 그렇게 울기만 하시더니 기자들 앞에선 절 감싸며 ‘우리 석천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느냐. 저리 물러서라’고 소리 치시대요. 그때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느낌이 뭔지 알았습니다.”
공항까지 따라나와 차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도 혹시 그가 혼자 나쁜 생각을 할까 싶어 그의 집에 머물며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동성애적 성향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아들 홍석천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변함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지금도 어머니는 “석천이가 바른 길로 돌아와 여자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해

“부모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제가 다시 잘 될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어요. 캐스팅 제의를 받고 계약 직전까지 갔다가 방송사 고위층의 반대로 출연이 무산되는 일이 3년간 수도 없이 반복됐는데도 끝까지 저를 믿어주셨죠. 그리고 마침내 재작년에 커밍아웃한 뒤 처음으로 SBS 드라마 ‘완전한 사랑’(김수현 극본, 곽영범 연출)에 캐스팅됐을 때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제가 다시 TV에 나오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고마운 분들에게 뭐라도 보답해야 되겠다며 고향 특산품인 청양고추를 빻아서 서울로 보내셨죠(웃음). 제가 직접 김수현 선생님, 곽영범 감독님께 갖다 드렸어요.”
한때 세상의 손가락질에 시달리던 아들이 지난해 시사주간지 ‘타임즈’ 아시아판이 선정한 ‘2004년 아시아의 영웅(Asian Hero)’으로 뽑히는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방송에도 복귀하자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제라도 이상한 생각을 버리고 정상인으로 돌아오라”는 바람을 말씀하신다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어머니는 지금도 날마다 성경책을 앞에 두고 제가 여자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아버지는 결혼식만 다녀오면 제게 전화를 거셔서 ‘더 늦기 전에 선 좀 보라’고 하시고요(웃음). 언젠가는 부모님이 저의 남자 애인을 보고 반가워해주실 날이 오기를 바라지만, 지금은 절 너무 사랑해서 아들이 ‘정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부모님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해요.”
홍석천은 부모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엄마 사랑해” “아빠 사랑해”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고 한다. 커밍아웃 후 고통스럽던 시절,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시작한 ‘애교’가 이제는 전화 인사로 굳어져버렸다. 처음에는 다 큰 아들의 ‘사랑 타령’에 어색해하던 부모도 요새는 “아들, 오늘은 왜 ‘사랑해’ 안 해?”라며 먼저 챙길 정도가 됐다고. 많이 고통스러웠던 커밍아웃이 가족 사이의 사랑만큼은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줬다는 증거다.
“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게 변했어요. 예전에는 저를 보면 손가락질부터 하던 사람들이 요새는 환하게 웃어주고, 먼저 반갑게 말을 걸기도 하죠. 그런데 제가 이만큼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준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그 사이 너무 많이 늙으셨어요. 제발 오래오래 건강하셔서 막내아들이 다시 부모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런 아들이 되는 모습을 지켜봐주셨으면 하는 게 요즘 제 가장 큰 소망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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