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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공모 당선작 [우수상]-노은정

입력 2005.07.15 10:44:00

노은정(29, 서울시 서초구 서초4동)
친정 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공모 당선작 [우수상]-노은정

엄마를떠올리며 문득 효(孝)자를 써본다. 새삼스레 적고 보니 고 녀석 생긴 것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들(子)이 노인(老)을 등에 업고 있는 모양새다. 옛날 사람들은 아들이 부모를 잘 모시는 것만 효도로 여겼는지… 혼자 입을 삐죽거리며 종이가 뚫어져라 ‘孝’자 위에 볼펜을 그어댄다. 아기가 잠든 사이 그 비좁은 틈에 떠오른 엄마의 모습을 바쁘게 그려내는데 자꾸만 이 ‘孝’자가 발목에 매달린 돌멩이처럼 달그닥 소리를 내며 딸려온다.
엄마. 내 가슴속 뜨거운 심장처럼 존재도 잊혀진 채 쉼없는 박동에서 박동으로 나를 세워온 무한의 당신. 그런 엄마의 이름 앞에 어느새 ‘친정’이란 두 글자가 붙었다. 단지 두 글자 차이인데 ‘엄마’는 핏속에 녹아들고 ‘친정 엄마’는 가슴속에 내려앉는다. 여자의 일생을 통한 애틋한 공감이 혈육의 본능보다 더 현실적이기 때문일까. 부모에 대한 도리적인 존경보다는 교감에서 비롯된 진정한 이해가 효도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엄마를 의식적으로 친정 엄마로 호칭하는 것도 그러한 효의 작은 실천이라 자부한다. 어떤 실천이 되었든 엄마를 잘 모셔야지 다짐하는 그 순간이면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서늘한 파도가 스멀스멀 몰려 올라와 눈가에까지 그 서늘한 기운을 뿌리고 가곤 한다.
서늘해진 눈을 지그시 감고 친정 엄마와의 추억을 반추해본다. 소의 되새김질처럼 하나하나 꺼내어 이리저리 돌려가며 단맛, 쓴맛 다시 혀를 대어본다. 그런데 아무리 되뇌어봐도 그 다채로운 추억들 중에서 유독 흑백으로만 떠올려지는 부분이 있다. 내 나이보다도 훨씬 오래된 영사기에서 삐걱거리며 힘겹게 돌아가는 필름처럼 얼룩투성이의 구멍난 잿빛 영상이다.
하얀 상복을 입으신 엄마는 옷보다 더 하얗게 질린 얼굴이다. 시야가 훤하게 뚫린 먼발치 좁다란 논길 사이로 엄마는 비틀비틀 눈물을 뿌리며 위태롭게 혼자 뛰어가신다. 그 뒤로 검은 옷을 입은 두서너 명이 엄마를 쫓는다. 눈도 못 뜨고 뛰던 엄마는 논두렁 너머로 갑자기 몸을 날리듯 사라져버리고, 잠시 후 뒤쫓는 사람들에 의해 부축을 받으며 다시 논길에 올라섰다. 옷에 흙물이 덕지덕지 올라 엄마의 얼굴이 더욱 새하얗게 보인다. 모내기가 한창인 논도, 논 끝에 닿아 있는 먼 산도, 내려앉을 듯한 구름도 모두 잿빛투성이다….
불의의 사고로 아빠가 떠나가신 지 23년이 되었다. 내 나이 올해 스물아홉이니 아빠와의 추억은 조각난 사진 몇 장뿐, 기억 저편에서 아득하다. 아빠의 기일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의례가 된 지 오래고, 한창 감수성 예민하던 사춘기 시절을 빼고는 눈물을 쏟으며 그리워한 적도 없는 것 같다. 그나마 몇개의 조각으로 흐릿하게 남아 있는 아빠를 그리워한 것은 빈자리의 존재에 대한 아쉬움이었지 나와 고작 6년의 세월을 함께한 그 아빠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만큼 아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러나 엄마는 다르다. 아빠와 함께 했던 6년의 시간은 세월의 망치질로 가슴속 깊이 박혀 23년을 지내오셨다.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 그리고 혈혈단신 어린아이들과 남겨진 서울생활. 나이 스물아홉에 엄마는 청춘을 땅에 묻었다. 어린아이 둘을 키워내는 것 이외에 어떤 목표도 허용할 수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켠에 시커먼 피멍이 든다. 올해 내 나이가 바로 스물아홉이다. 시커먼 절망의 하늘이 차디찬 땅과 맞닿아버렸던 엄마의 그 나이인 것이다. 문득 이번 내 생일에 엄마가 주신 카드에 적힌 한마디가 떠올라 눈앞이 또 얼룩거린다.
‘내 딸 스물아홉 생일의 이 행복이 평생 영원하길 바란다.’
받을 당시에는 그것이 일상적인 축하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암담했던 스물아홉 현실이 결코 딸에게는 되풀이되지 말라는 눈물의 기원이었다.

내 새끼 키운다고 잊고 있었던 친정 엄마의 내리사랑이 해일처럼 밀려왔던 내 생일 이후 나는 의식적으로 엄마를 위한 작은 실천들을 해나가고 있다. 가깝게 사시지만 매일 두서너 번은 전화를 드리고, 아들녀석과 함께 틈나는 대로 찾아뵙는다. 엄마가 내 수고를 던다며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오셔서 집안 살림이며 육아를 도와주실 때면 예전 같지 않게 곁에 다가가 애교도 떨어본다.
“엄마~ 너무 고마워잉~”
“얘가 아기를 키우더니만 더 어린애가 돼가네.”
나의 어색한 노력에 엄마도 멋쩍게 웃으며 한마디를 던지지만 23년 목석처럼 한곳만 보고 살아오신 엄마에게 이 정도의 표현은 얼음 깔린 계곡 사이로 졸졸 찾아온 봄내음 같은 것이다. 잦아진 왕래만큼 깊어진 정에 엄마도 나도 아들녀석을 가운데 두고 행복을 맛보느라 매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자식이 이어주는 ‘어머니’라는 교감이 엄마와 나를 더욱 단단한 하나가 되게 하는 듯하다.
행복을 위한 내 노력을 하늘도 가상히 여겼는지 신랑에게도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미국 학교에서 입학허가통지가 온 것이다. 그것도 아주 좋은 성적에 장학금까지 지급한다고 했다.
“엄마!! 윤 서방 정말 대단하지! 너무너무 잘된 것 같아!”
“잘되기는! 학교가 별로잖아. 윤 서방이 원했던 학교보다 훨씬 떨어지는구먼. 공부 다시 해서 좀더 좋은 학교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장모님. 제 나이가 있고….”
신랑이 주저하다 말을 잇지 못했다. 기쁨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어렵게 받은 합격에 수고했다, 잘했다는 축하 한마디 없이 신랑을 꼬챙이 끝에 대롱대롱 매달아버린 느낌이었다. 순간 감정이 격해진 나도 담을 수 없는 말을 뱉어버렸다.
“엄마! 뭐 그런 말이 다 있어? 학비 대줄 것도 아니면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독침이 묻은 화살은 떠난 뒤였다. 신랑도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엄마는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셨다. 엄마의 가슴에 작은 핀도 아니고 말뚝을 박아버렸으니 내 가슴 역시 말뚝을 들면서 생긴 상처들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피를 나눈 부모 자식은 서로를 내 몸처럼 잘 알기 때문에 더욱 말조심하고, 아픈 곳을 후벼 파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고 그렇게도 다짐했건만…. 무서운 후회가 가슴을 짓눌러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산이 부서져 깔린다.
유학으로 떨어져야 할 딸과의 이별연습하는 엄마의 속마음 몰랐던 못난 딸

엄마의 기분을 풀어드리느라 이제껏 해오던 노력의 백 배는 들었나보다. 그래도 손자가 있어서 화해는 빨랐다. 아기는 부부간 사랑의 촉매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녀석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가 좋은 선물은 없었다. 아무튼 회오리가 지나간 자리에 어느 정도 다시 평화가 오는 듯싶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완전 복구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 엄마가 예전 같지 않으셨다. 불쑥 찾아오던 걸음은 아예 끊으셨고 전화를 해도 늘 바쁘다면서 급하게 끊어버리는 일이 많아졌다. 친정에 찾아가도 반기기는커녕 바쁘게 나가는 길이라며 몇 분 앉아 있지 못하고 함께 나오기가 다반사였다. 한번은 몸살이 나서 아들을 부탁드렸는데 그때도 미안하지만 약속이 있다면서 전화로 안부를 대신했다.
인지상정인지라 아프면 부모를 찾게 되는 것인데 그것도 외면하시다니. 서운함이 고개를 쳐든다. 신랑은 내가 백 번 잘못한 것이라며 장모님에게 더 잘해드리라고 채근이다. 철없는 딸의 작은 가슴에서는 이해의 한계에 이르렀다는 신호를 보내고 엄마의 냉랭함은 다시 따듯해질 기미가 없었다. 슬며시 나도 지쳐서 엄마의 전화번호를 자주 누르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라 부르는 엄마의 절친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무래도 너에게는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아서….”
심상치 않은 화두에 심장은 벌써 귀를 타고 전화기를 때려대고 있었다.
“엄마가 병원에 다니셔. 너 미국 간다며. 우울증이 다시 재발한 것 같더라.”
쿵쿵거리던 심장이 타들어가나 보다. 온몸에서 열이 나고 연기가 나는지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랬다. 엄마는 재작년 내가 시집간 이후 극심한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으셨던 것이다. 29년 삶의 목적처럼 갖은 고생 마다 않고 고이 기른 자식을 떠나보낸 그 상실감을 나는 왜 미처 짐작하지 못했을까. 시집간 딸자식 맘 상하게 하지 않겠다고 비밀로 하고 혼자 병원 다니시며 얼마나 힘드셨을까.
“은정아~ 엄마 전철 타고 있는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미워 보이니. 웃고 있는 사람들 다 한 대씩 때려주고 싶은데 어쩌냐.”
“그냥 때려주면 되지.”
장난으로 받아넘겼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딸을 시집보내고 상실감에 전철 안에 있는 행복한 사람들까지도 미워 보이는 엄마가 그제야 내 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땅속에 있던 세월을 토해내는 한여름 매미의 울음소리보다도 더 큰 통곡으로 나는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엄마는 신랑이 더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한 것이 아쉬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이제야 다시 살며시 찾아온 행복을 걷어차 내기라도 하듯 유학생활로 떨어져 있어야 할 빈자리를 나보다 먼저 찾으신 것뿐이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혼자 이별 연습에 들어가신 것이다. 엄마를 위한다며, 나름대로 효녀라 자부하며 까불던 내 모습에 대한 창피함과 자책이 통곡 속에서 가슴까지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커튼 그림자 끝자락이 방구석에 박히고 사라질 때까지도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그날 저녁 신랑은 엄마의 녹색수첩을 한 권 밀어놓는다.
“이게 뭐야?”
“장모님 여권하고 미국 비자야. 이제 다음 달에 출국해야 하는데 우리 있는 동안 장모님도 오셔서 자주 관광도 하고 그래야지.”
“….”
아들(子) 대신 딸(女)이 업고 있어야 한다는 나만의 ‘효’자는 신랑의 말없이 깊은 효심에 달그락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환하게 웃는 비자 사진 속 엄마가 또다시 얼룩진다.

여성동아 2005년 7월 4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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