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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공모 당선작 [최우수상]-이현정

입력 2005.07.15 10:28:00

이현정(37, 경기도 구리시 교문2동)
친정 엄마에 대한 감동사연 공모 당선작 [최우수상]-이현정

“엄마, 아버지 여기 있어! 여기 말야, 여기 다리 밑에!”엄마와 나는 다리 밑으로 얼른 내려가 술에 취해 거의 널브러져 있다시피 한 아버지를 끌고 낑낑거리며 다리 위로 올라왔다. 술에 절어 있는 아버지를, 아무리 사람이 둘이라 해도 들어서 집까지 가기는 역부족이었다.
잠시 후 엄마는 리어카를 구해 왔고 엄마는 앞에서, 나는 뒤에서 아버지를 싣고 집으로 오고 있었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밤 자정 무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리어카가 넘어지면서 엄마가 신작로 옆 논바닥으로 굴러 떨어져버렸다. 겨우 초등학교 2학년생이던 나는 엄마와 아버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난 올해 서른일곱 살이 되었고, 아이도 둘이나 낳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7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아버지의 꿈은 내게 악몽이다. 이런 꿈을 꾼 날은 중간에 깨어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뒤척하다 새벽 6시가 되기를 기다려 엄마에게 전화를 한다. “엄마, 잘 잤어? 아무 일 없는 거지? 그렇지?” 엄마에게 답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몇 가지 질문을 한꺼번에 쏟아놓는다.
“그럼, 아무 일 없어. 왜 안 자고 새벽부터 전화야. 또, 니 아버지 꿈이라도 꾼겨?” 엄마는 내가 아버지 꿈만 꾸면 잠을 못 자고 있다가 정확히 새벽 6시에 엄마에게 전화한다는 걸 잘 알고 계신다. 엄마의 무사함을 알고서야 나는 잠시라도 마음 편히 누울 수 있다.
38년 전, 엄마는 조실부모하고 가진 것 하나 없는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아버지는 술을 좋아하고 노름을 즐겼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이발 기술을 배워 작은 이발소도 운영했지만 이발소가 뜻대로 되어주지 않자 다시 노름을 하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엄마는 돌도 되지 않은 나를 업고 이 집 저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다니셨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를 찾는다 해도 아버지는 엄마를 따라 집으로 오지 않았다. 그 뒤로 여동생이 넷이나 더 태어나서 우리 집은 딸만 다섯이 되었고 딸만 우글거린다는 핑계가 한 가지 더 늘어 아버지의 술과 노름 버릇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져갔다.
반면 아버지가 이런 일로 가장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때 엄마는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낮엔 남의 집 논일 밭일로, 밤엔 실밥 뜯기나 구슬 꿰기 같은 부업으로 생계를 이어 나가셨다. 늘 바쁜 엄마에게도 굳이 단 하나의 쉼표가 있었다면 그건 음력 초하룻날 절에 가시는 일이었다. 어릴 적엔 나도 엄마를 따라 곧잘 절에 가곤 했는데 옆에서 본 엄마는 무얼 그렇게 비는지 부처님 앞에서 바닥에 코가 닿도록 절을 하고 또 하셨다.
아버지와 엄마가 정반대의 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우리들은 자랐다. 평소 엄마는 먹는 것은 남만 못해도 입성은 깨끗해야 한다며 끊임없이 옷을 얻어다가 두드려 빨고 꼭 짜서 햇볕에 바짝 말려 깨끗해진 옷을 입히셨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책가방을 들고 엄마에게 쪼르르 붙어 아침마다 준비물을 살 돈을 타갔다. 엄마는 정말 구두쇠여서 우리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꼭 반만 주셨다. 세월이 흘러 내가 고3이었을 때, 본고사를 보려면 해당 대학에 가야 했는데 시험 전날 갑자기 집에 불이 났다. 대학시험을 보려면 적어도 하루 전에는 출발을 해야 했지만 집에 불이 나는 것을 뻔히 지켜보면서 서울로 갈 수는 없었다. 그 불이 난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함부로 놓은 담배꽁초가 이불에 옮겨붙어 일어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난한 살림에 시험을 쳐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포기해도 되는 확실한 이유가 생겨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그런 생각으로 멍하게 불난 집 앞에 서 있을 즈음, 억센 팔 하나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온몸에 숯검정을 뒤집어쓴 엄마였다. 엄마의 손엔 내 책가방과 2만5천원이 들려 있었다. 엄만 그것을 내게 주며 말씀하셨다.

“당장 서울로 가라, 당장. 집 걱정은 할 거 없다.” 어리둥절한 나를 엄마는 떠밀다시피 했다. 엄마의 배려로 나는 무사히 시험을 치를 수 있었고, 합격까지 했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당장 집도 절도 없는 형편에 대학 등록금이 있을 리 없었다. 숟가락 하나 제대로 건지지 못한 처지에 불속에서 건진 전부가 내 책가방이라니….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났다. 다니지도 못할 대학을 시험만 보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열아홉 살 시절에 곧바로 이어진 사회생활은 정말 힘이 들었다. 그때마다 슬며시 엄마를 원망했다. 엄마와 나는 직장에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와서도 편히 쉬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술 취한 아버지가 길에서 한뎃잠을 자다가 큰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마루엔 오래된 괘종시계가 있었는데, 그 시계가 밤 12시를 칠 때 엄마와 나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긴장을 하며 서로의 방에서 나와 마루에 앉아 있었다. 1시가 다 되면 우리는 겉옷을 입고 손전등을 들고 동네 이곳저곳을 비추며 돌아다녔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해왔던 이 일은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나를 꿈에서조차 괴롭힌다.
술에 취한 아버지를 집까지 모시고 오기 위해 밤 1시 집을 나서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4년 되던 해에 다행히 엉성한 집이라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돈이 모자라 담을 만들지 못하고 방 두 개에 툇마루가 하나 달린 슬레이트집이었다. 그때 마침 둘째가 일류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동생이 받아온 합격증과 장학증서를 내놓은 순간 엄마는 한 번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난 그때 생각했다. ‘엄마도 하얀 이를 내놓고 저렇게 환히 웃을 수 있구나’ 하고.
난 직장생활을 하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 결혼을 했고, 둘째는 야간 대학원을 다니며 악착같이 공부해 지금은 교수가 되었다. 셋째와 넷째도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막내도 지금 대학 4학년이다.
내가 큰아이를 낳고 몸조리할 때 뜬금없이 엄마가 내게 공부를 더 해보지 않겠냐고 물으셨다. 소리내어 말하진 않았어도 항상 숙제처럼 ‘나도 언젠가 동생들처럼 학사모를 써봐야지’ 했던 터였다. 출산휴가가 끝나고 복직을 한 나는 바로 대학입시 학원에 등록했다.
아이는 엄마가 아예 데려가 밤낮으로 봐주셔서 보통 직장 다니는 수험생과 똑같이 공부할 수 있었다. 주말에만 아이를 데려와 함께 있다가 일요일 저녁에 아이를 엄마에게 데려다주고는 했는데, 입시가 가까워 올 즈음에는 엄마가 버스와 전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고 아이를 잠깐씩 데리고 오셨다가 다시 데리고 가셨다.
그렇게 고생하기를 5년여 만에 나는 다시 대학생이 되었고, 넷째와 같은 해에 학사모를 쓸 수 있었다. 엄마는 나이보다 빨리 더 허리가 아프셨고, 남들보다 빨리 머리가 쉬이 세셨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아이를 합쳐 모두 여섯이나 키우셨고, 일이 손에서 떠날 날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 아이가 여섯 살이 되어서야 우리 집으로 보내주셨고, 아버지도 예전처럼 밖으로 다니시지를 않아 안도의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엄마에게 아직도 더 할 고생이 남았던 것일까, 아버지가 덜컥 쓰러지셨다. 병명은 알코올성 간경변증.
첫날 대학병원 중환자실로 들어간 아버지는 그후 퇴원과 입원을 반복했다. 엄마도 엄마대로 바빠지셨지만, 우리들도 각자의 직장으로, 집으로, 친정으로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였다. 그러나 자식이 다섯이나 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다들 직장에 매여있는 몸이라 아버지가 갑자기 각혈이라도 하는 날엔 엄마 혼자 앰뷸런스 불러서 응급실로 가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나서 어느 정도 수습된 뒤라야 자식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엄마의 속을 무던히도 태우다가 발병한 지 3년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병원을 드나들 때엔 너무 약이 올라 펄펄 뛰고 싶은 날들도 많았다. ‘아버지가 도대체 우리에게 뭘 해준 게 있다고, 결혼까지 한 우리들을 이렇게도 고생시키느냐’며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우리들은 다시 직장으로 가정으로 돌아가면 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문제는 엄마였다. 우리들은 이제 엄마도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편히 사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동생들과 상의해서 생활비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풀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부터 엄마는 각종 병과 다시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만 했다. 그동안 엄마 몸속에 숨어 있다가 긴장이 풀리니 하나 둘 나타나는 많은 병들과 말이다.

3년 전에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으셔서 친한 동네 아주머니가 신경정신과에 강제로 데리고 가셔서 6개월여간 입원한 적도 있었다. 퇴원하고 나서는 고질병인 허리와 위장병이 엄마를 괴롭히고 있다. 하루 월차휴가를 내어 연락 없이 엄마에게 갔다.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지만 문이 잠겨 있었다. 엄마가 계시지 않았다. 이상해서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휴대폰을 보니 음력 1일이었다. 갑자기 절 생각이 났다.
구두를 신고 엄마가 다니는 비포장도로의 작은 절엘 가봤다. 엄마는 그 아픈 허리로 예전처럼 열심히 부처님 앞에 절을 하고 계셨다. 대웅전 앞마당에 앉아 엄마의 절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40분 뒤 엄마가 나오셨다. 댓돌 위의 신발을 돌려놓으며 대뜸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뭘 그렇게 빌었수?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응?” 엄마는 그냥 웃고만 계셨다. “엄마 허리랑 다리랑 아프지도 않아? 그렇게 절을 하게?” 하고 연신 물었지만 그냥 웃기만 하셨다.
그날, 점심을 먹으면서 엄마는 조용히 내게 물으셨다. “아직도 아버지 원망하니?” “글쎄, 아주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이제 원망보다 그립단 생각이 먼저야.” 내 말에 엄마는 고개만 끄덕이셨다.
엄마와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나는 아이들 때문에 집으로 와야 했다. 휴가 때라도 애들하고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게 엄마 된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한참을 생각했다. 엄마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자식을 남겨준 고마운 사람’ 정도였을까? 아님, ‘평생 고생만 시키다 먼저 간 사람’ 정도였을까? 이도 저도 결론을 내진 못했지만, 내가 아버지와 엄마의 딸인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전화할 때 들리는 엄마의 음성은 나를 기쁘게도 안절부절 못하게도 한다. 한평생 힘들게 살아오신 우리 엄마, 가엾은 엄마, 이젠 아픈 몸만 가지고 계신 엄마.
더 늦기 전에 엄마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엄마! 엄마가 부처님 앞에서 수만 번 올리신 절 때문에 우리들이 이렇게 잘 살고 있어요. 이제 우리가 그 절값을 되돌려 드릴 테니 아프지 말고 사세요, 어렸을 땐 엄마가 왜 저렇게 사나 하고 원망한 적도 있지만, 이젠 알아요. 우리 때문에 모든 것 다 이기고 사셨다는 것을, 다음 생에 태어나도 다시 엄마 딸로 태어날래요”라고.
며칠 전 엄마의 머리에서 수북이 올라온 흰머리가 눈에 거슬린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꼭 미용실에 모시고 가 요즘 유행하는 최신식으로 염색을 해드려야겠다. 오는 길에 맛난 음식도 사드려야지. 벌써부터 엄마와의 데이트가 기다려진다. 그땐 꼭 하고 싶었던 이 말을 해보련다. “엄마 사랑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당신을. 그리고 가슴 깊이 감사해요”라고.

여성동아 2005년 7월 4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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