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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좌절은 없다

세상 편견 이기고 홀로 아이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미혼모 고정희

"어머니 세상 뜨고 바닥으로 추락했지만 절망 견디니 희망이 기다리고 있네요."

■ 기획·송화선 기자 ■ 글·이동주‘자유기고가’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5.06.09 09:58:00

지난 5월 KBS ‘인간극장-두 여자’ 편을 통해 남다른 인생사가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은 ‘싱글 맘’ 고정희씨.
사랑이라 믿었던 남자의 갑작스런 변심과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이중고를 딛고 홀로 아들을 키우며
밝게 살아가고 있는 그를 만나 절망을 이겨낸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세상 편견 이기고 홀로 아이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미혼모 고정희

고정희씨(36)를 만나러 가던 날 오후,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다. 비 오는 날이면 고씨는 슬픔에 빠진다고 한다. 5년 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믿었던 남자에게 배신 당하고, 홀로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할 상황에 놓인 자신을 끝까지 감싸주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하늘은 하루 종일 비를 뿌렸다.
“그 때는 엄마 생각하며 울기만 하는 못난 딸이었지만, 이제는 아들과 함께 꿋꿋이 살아가는 ‘어른’이 됐어요. 작지만 우리 모자가 함께 살아갈 방도 한 칸 마련했고요. 비가 내리면 이 모습을 못 보고 일찍 가버리신 엄마 생각이 나서 울다가 웃다가 해요.”
고씨는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다섯 살배기 아들 솔베와 함께 살고 있는 미혼모. 세상이 변했다지만 아직 우리나라에서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미혼모라면 일단 행실이 바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시선이 고씨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저, 아주 고지식한 여자예요. 아이가 생겼다는 걸 알고 처음 한 생각이 ‘당연히 낳아야지’였거든요. 결혼을 약속했던 솔베 아빠가 갑자기 저를 떠났을 때도 낙태는 상상도 하지 않았어요.”
고씨의 어린 시절 소망은 현모양처였다고 한다. 평생 자신만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 아이 낳고 오순도순 사는 것만이 여자의 행복이라고 믿은 것. 학교를 졸업하고 에어로빅 강사로 일하던 시절 솔베 아빠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도 자신의 오랜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두 사람이 함께 한 결혼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혼자서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열 달을 견뎌야 했을 때 그가 겪었을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제는 모두 끝난 일”이라며 솔베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한사코 꺼리는 고씨에게 배신의 충격은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 있는 듯했다.
그 시절 유일하게 고씨를 지켜준 사람이 어머니. 가족들조차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며 그를 비난할 때 어머니만은 고씨를 감싸주었다. 솔베 아빠가 떠난 뒤 자신과 아이의 처지를 생각하며 매일 눈물로 지새던 고씨를 끌어안고 “어미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내가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며 다독여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하던 어머니가 고씨의 출산 예정일을 며칠 앞두고 그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자신을 지켜주는 최소한의 보호막이 사라지면서 사회의 냉대 앞에 내몰린 고씨는 그때 처음으로 아이를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어머니 세상 뜨자 가족 모두 미혼모인 고씨를 외면
세상 편견 이기고 홀로 아이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미혼모 고정희

“당장 저 혼자 먹고 살기도 힘들었어요. 임신하면서 일을 그만뒀는데, 가족들이 저를 외면했거든요. 할 수 없이 저처럼 오갈 데 없는 여자들을 받아주는 복지관에 들어갔죠. 거기는 아이를 낳으면 바로 해외로 입양시키겠다는 조건에 동의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어요.”
엄마로서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 고씨로서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한국에서 미혼모의 자식으로 자라며 손가락질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능력 있는 양부모 밑에서 크는 편이 아이에게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출산 뒤 약속대로 솔베를 입양 단체로 보내자마자 고씨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임을 깨달았다. 딱 한 번 품에 안아본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 편견 이기고 홀로 아이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미혼모 고정희

“그제야 아이를 잃고 나면 나도 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다른 사람들 말대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결혼한다고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아이가 어른이 되어 날 찾아오면 뭐라고 얘기해야 하나, 갖가지 생각이 드니까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결국 고씨는 아이를 되찾기 위해 입양기관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입양기관에서는 아이를 데려가려면 제왕절개 수술비와 그동안의 숙박비 등 1백만원을 내라고 요구했다. 당시 고씨가 가진 전 재산은 90만원. 단돈 10만원이 부족해 아이를 영영 잃어버릴지 모를 상황이었다.
“마음이 너무 다급했는데 주변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하는 수 없이 솔베와 함께 사설 모자원에 들어가기로 하고, 그 시설 원장님에게 통사정해 10만원을 빌렸죠. 그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가슴이 저려와요.”
간신히 아이를 되찾은 고씨는 그에게 솔로몬의 ‘솔’자와 베드로의 ‘베’자를 딴 ‘솔베’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앞으로 닥칠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치든 자신과 아이가 지혜롭게 헤쳐나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아이를 데리고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생계 유지를 위해 산후 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다시 에어로빅 강사 일을 시작했지만, 건강이 너무 나빠져 곧 그만둬야 했다.
하루하루 힘겹게 견디던 고씨에게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은 2003년 동사무소에서 소개해준 사회복지시설 동광모자원에 들어가면서부터. 그곳에서 그는 ‘인생극장-두 여자’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미경씨를 만났다. 이씨가 모자원에 들어온 이유는 사업에 실패한 남편이 그와 아홉 살 난 딸만 남겨둔 채 집을 나갔기 때문. 감성적이고 여린 고씨와 달리 현실적인 이씨는 삶의 의욕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아빠 없는 아이들을 세상 그 누구보다 당당하고 밝게 키우기로 의기 투합하고,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는 저소득 모자 가정 가장들에게 창업자금을 지원하는 ‘아름다운 재단’ 기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제 남은 소망은 아들 솔베를 건강하고 바른 사람으로 키우는 것뿐
“지난해 10월에 여기서 빌린 돈 1천5백만원으로 상계동 ‘먹자 골목’에 식당을 냈어요. 요리 솜씨 좋은 미경씨가 주방 살림을 맡았는데, 가게가 기대 이상으로 잘 돼요. 문을 열자마자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서 깜짝 놀랐죠.”
세상 편견 이기고 홀로 아이 키우며 씩씩하게 살아가는 미혼모 고정희

고씨의 사연이 KBS ‘인간극장’에 방송된 뒤부터는 그야말로 발 디딜 틈도 없이 손님들이 식당을 찾고 있다. 그중에는 고씨를 격려하고 솔베에게 과자 하나라도 사주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찾아오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요즘엔 장사가 잘되니까 아이 돌볼 시간이 줄어들어서 마음 아파요. 솔베가 유치원에 다니는데, 며칠 전 아침에는 저를 붙잡더니 ‘엄마, 오늘은 나 유치원 안 가고 엄마도 식당 안 나가고 둘이 놀면 안 돼?’ 하고 묻더라고요. 아빠가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아픈데 엄마 정마저 굶주리게 된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하지만 지금 고생해야 솔베의 미래를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습니다.”
이제 고씨에게 남은 소망은 솔베를 건강하고 바른 사람으로 키우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지금의 고통은 이겨내야 한다며 고씨는 굳은 결심을 내비쳤다. 대신 고씨는 솔베에게 엄마가 솔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 이야기도 모두 들려줄 생각이다.
“솔베가 어려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 아빠는 미국에 있다고 말해두었어요. 하지만 내년쯤 되면 진실을 알려줄 겁니다. 대신 솔베가 태어난 건 엄마랑 아빠가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꼭 이야기해줘야죠. 저는 솔베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당당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거든요.”
고씨가 숨기고 싶은 사연까지 모두 공개하며 TV에 나선 것도 솔베에게, 그리고 더 어려운 처지의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씨는 “방송이 나간 뒤 혼자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엄마들이 ‘절망 속에 빠져 있었는데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었다’며 소식을 전해오곤 한다”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이야기를 하기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벼랑 끝에 섰다고 느낀 순간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이 보였다는 고씨. 그는 정말 살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세상 어딘가에서 분명 희망의 손길이 다가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고 한다. ‘뒷걸음쳐 달아나기보다는 무조건 최선을 다해 부딪쳐 보기’. 이것이 지금 고통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고씨가 해주고 싶은 조언이다. 오늘 고씨에게 주어진 행복은 바로 이렇게 산 고씨에게 세상이 보내준 선물일지 모른다.


여성동아 2005년 6월 4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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