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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Happy Talk

멋지고 아름답게 나이 들기

입력 2005.06.01 11:54:00

멋지고 아름답게 나이 들기

사람들은 늙는 것을 두려워한다. 늙지 않기 위해 고가의 화장품을 바르고 건강보조제를 먹어댄다. 수술대 위에 누워 얼굴에 칼을 들이대기도 한다. 하지만 늙는 것이 그렇게 괴롭기만 한 일일까. 늙는 것이 두려운 이유는 ‘나도 저렇게 늙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노년의 모델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96세의 피천득 선생을 만나고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즐겁게 사는 사람에게 인생은 ‘언제나 청춘’이고 매일이 ‘찬란한 봄’이다.
어쩌면죽음보다 노화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가 더 큰 것 같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지만 자글자글 주름진 몸으로 소외 당하며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즐거운 사람이 있을까. 아직 자신은 청춘이라고 믿고 싶어도 마흔만 넘으면 이미 젊은 세대들에게 밀려 서러움을 느끼는데 말이다.
어떤 이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안 늙어보려고, 어떻게 해서든 젊음을 유지하려고 자신의 몸을 생체실험하고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기도 한다. ‘노화를 방지해준다’는 새빨간 거짓말에 속아 수십만원짜리 화장품을 덕지덕지 발라보기도 하고 칼슘·비타민제는 물론 각종 건강보조제를 불로초인 양 먹어대기도 한다. 수술대 위에 누워 얼굴에 칼을 들이대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20대의 탱탱한 얼굴로 나이 먹어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늙는 것이 정말 그렇게 추하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일까. 주름살이 있다고 혹은 눈이 가물가물해졌다고 햄버거도 못 먹고, 청바지도 입으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틀니 낀 노인은 키스도 못하고 사랑받을 자격도 없을까.
사람들이 나이듦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사회의 편견도 있지만 주변에 멋지고 근사하게 노년의 삶을 구가하는 이들이 드물기 때문이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상적인 모델을 발견하기 힘들어서다.
우리가 ‘노인’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보자. 심술궂은 할멈, 괴팍한 할아버지,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녹음기처럼 반복하는 습관, 뒷방이나 탑골공원 벤치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모습, 치매에 걸려 대소변도 못 가리고 가족조차 못 알아보는 상태… 아집, 집착, 독선 등의 부정적인 단어와 고독하고 우울한 장면들이 자동적으로 따라온다.
그런데 나는 이제 나이 드는 것이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잘 늙은 분, ‘저렇게 나이 들면 정말 좋겠다’는 이상적인 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전에 어떤 남자에게도 그처럼 귀엽고 재미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난 96세 노인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다. 바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다.
아흔여섯 살에도 젊은 세대처럼 유머감각 뛰어난 피천득 선생
교과서에 실린 수필 ‘인연’을 비롯, 그의 시와 수필을 읽고 전부터 존경하는 마음이 있기도 했지만 그가 아흔 살 되던 해 생일을 맞아 인터뷰한 기사를 신문에서 보고 난 후 너무나 그분을 만나고 싶어졌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부자는 돈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추억이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지요.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세웠지만 그곳을 거니는 연인들의 것이거든요. 좋은 그림을 소유해야 행복한 것도 아니죠. 기억 속에 넣어두면 되니까요. 좋은 기억은 욕심 갖고 살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꽃향기 가득하고 신록이 아름다운 5월, 피천득 선생을 만났다. 서른두 평 그의 아파트는 소박, 검소란 단어로는 표현이 부족하다. 가구래야 이웃에서 버린 것을 가져온 식탁과 의자, 낮은 테이블이 전부다. 침대 역시 간이용이다. 못질을 하면 이웃집에서 시끄러워할까봐 복제품 르누아르의 그림이며 포스터는 투명 테이프로 붙여놓았고 낡은 액자는 그냥 벽에 기대어 세워두었다. 장식품이라곤 아들, 딸, 손자들이 보내온 사진과 선생이 아끼는 인형뿐이다. 끔찍하게 사랑하는 딸 서영씨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은 이미 쉰 살이 넘었는데 아직도 그 인형을 머리 빗겨주고 목욕시켜준다고 한다. 집안 어느 구석을 둘러봐도 도무지 욕심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럭셔리한 이탈리아 가구, 유명 작가들의 그림, 대리석 바닥으로 꾸민 집에서도 느낄 수 없는 기품과 평화로움이 가득하다. 주인의 모습처럼.

멋지고 아름답게 나이 들기

피천득 선생은 96세인데 정정하고 청력도 좋아 다른 노인들과 대화할 때처럼 목청을 높여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신세대들처럼 유머감각도 뛰어나 그와 나 사이의 50년 나이 차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
“글쎄, 난 아직 내가 늙은 걸 잘 못 느끼겠어요. 귀도 잘 들리고 꽃이나 자연을 보면 좋고, 예쁜 여자들 보면 여전히 가슴이 뛰고… 아마 욕심 없이, 남과 비교하지 않고 살아서 건강이 유지되는 것 같아요.”
대화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원로학자답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거나 알려주겠다는 권위나 또 어르신답게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지 않았다.
“죽어 하늘나라에 가서도 특별하게 할 말이 없을 것 같고, 혹시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지금의 삶과 똑같이 살고 싶다”는 피천득 선생. 이렇게 되기까지 그동안 얼마나 절제하고, 얼마나 마음을 비우고, 또 얼마나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셨을까.
그는 남에게 보여지는 모습,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보다는 자신의 순수한 영혼에 충실하며 살아왔다. 좋아하는 꽃과 나무, 하늘을 보며 세포 마디마디 행복을 느끼고, 소박한 옷차림이나 빈약한 가구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좋은 그림이라면 진품이 아니라 달력에 담긴 것이라 해도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나의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고운 얼굴을 욕망 없이 바라다보며 남의 공적을 부러움 없이 찬양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아니하며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 그리고 나는 점잖게 늙어가고 싶다.”
선생이 중년에 쓴 글인데, 실제로는 이 글보다 더 멋지게 늙으셨다.
아기의 마음 되찾고 매일 즐겁게 살기
남들이 보기에 잘 늙어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이가 들면 어른다워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기보다 오히려 유치하고 아기다워지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하루 종일 흙장난에 몰두하며 느꼈던 충만한 기쁨, 넘어지고 넘어져도 씩 웃으며 다시 일어서던 자신감, 낯선 이들을 경계하지 않고 먼저 활짝 웃어주던 마음, 인형이나 강아지와도 대화를 나누던 순수함, 그리고 사탕 하나에도 금세 마음이 풀어지고 행복해지던 욕심 없는 마음을 되찾는 게 중요하다.
얼마 전 내게 도움을 받았던 한 분이 선물을 하고 싶다기에 인형을 부탁했더니 곰 인형 하나를 사주셨다. 사무실 책상 옆 보조의자에 그 인형을 앉혀두고 수시로 껴안고 대화도 나눈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의 간부사원이 사무실에서 곰 인형이랑 노는 게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서 후배들이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볼 수도 있겠지만 뭐 어떤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언제 잃어버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우울해하는 것보다 폭신폭신하고 귀여운 곰 인형을 껴안고 노래 부르는 것이 나에게는 더 행복인 것을….
늘 근심걱정에 가득 차 한숨만 쉬며 사는 이들은 나이가 몇이건 이미 노인이고, 일년 내내 겨울을 산다. 하지만 이렇게 키득거리며 즐겁게 사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언제나 청춘’, 매일이 ‘찬란한 봄’이다.


여성동아 2005년 6월 4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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