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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다시 꾸는 꿈

한국의 ‘밀리언달러 베이비’ 꿈꾸는 16세 탈북 소녀 최현미

“처음 글러브를 낄 때부터 챔피언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어요”

■ 기획·구미화 기자 ■ 글·이동주‘자유기고가’ ■ 사진·조영철 기자

입력 2005.05.10 16:14:00

최근 AP통신이 한 탈북 소녀를 할리우드 영화 ‘밀리언달러 베이비’의 주인공에 비유하며 ‘한국판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해 화제다. 지난해 가족과 함께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온 열여섯 살 최현미양이 그 주인공. 북한에서 권투선수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해 특별 관리를 받았던 최양이 한국에서 다시 권투를 시작하게 된 사연을 들어보았다.
한국의 ‘밀리언달러 베이비’ 꿈꾸는 16세 탈북 소녀 최현미

최현미양(16)이 훈련을 하고 있는 서울 군자동의 한 체육관을 찾은 시각은 오후 5시. 중년의 남자 혼자만 열심히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어 주위를 둘러보니 사무실 유리창 안으로 통통하고 앳된 얼굴의 그가 앉아 있다. 최양은 지난해 말 중앙일간지를 통해 ‘권투하는 탈북 소녀’로 처음 소개된 후 TV 뉴스에도 얼굴을 비쳤지만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런데 최근 AP통신이 ‘한국판 밀리언달러 베이비’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하면서 각종 매스컴으로부터 연일 취재 요청을 받고 있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갑작스러운 세인들의 관심이 썩 달갑지 않은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도 계속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무표정하게 모든 질문에 짧은 문장으로 답하던 그는 “지난해 말 뉴스에서 처음 보았을 때보다 많이 날씬해지고 예뻐졌다”는 말에 처음으로 10대 소녀다운 환한 미소를 보였다.
“북한에서 베트남으로 온 다음 한동안 호텔에서만 지냈어요. 작은 상자 속에 갇힌 것 같아 답답하고 마음도 우울했죠. 매일 하던 운동을 못하니까 살도 20kg 이상 쪄서 속상했고요. 안되겠다 싶어서 호텔 계단을 열심히 뛰었는데 호텔 간부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셔서 그것마저도 그만둬야 했어요.”
최양은 지난해 7월, 북한을 탈출해 제3국을 거쳐 집단 입국한 4백68명의 탈북자 중 한 명이다. 베트남에 도착해서야 북한을 탈출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그는 부모와 오빠가 곁에 있었기에 두려움은 전혀 없었지만 기약 없이 호텔 방에 갇혀 있어야 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한국에 정착한 지 어느덧 1년이 다 돼가는 지금 그는 힙합을 좋아하고, 가수 세븐에 열광하고, 친구들과 피자 먹기를 즐기는 평범한 여중생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남한의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묻지만 그에게 이곳 생활은 그다지 낯설지 않다고 한다. 북한에 있을 당시 무역업에 종사했던 아버지가 종종 한국 비디오를 구해와 오빠와 그에게 보여줬기 때문. 고위간부의 자녀나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명문 ‘평양 외국어 학원’에 다니며 친구들을 통해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접할 기회가 많았던 그의 오빠도 그에게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한다. 그에게 처음 한국 비디오를 봤을 때의 소감을 묻자 “남한 사람들은 저렇게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라고 한다.
“북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가난한 건 아니에요. 전 편견은 안 좋다고 생각해요.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 특별히 다르지 않거든요.”
일반 근로자 월급 7배 수준의 장려금 받으며 세계 챔피언 유망주로 기대 모아
제 또래보다 훨씬 속이 깊고 주관이 뚜렷한 그는 한국에 와서 가장 좋은 점으로 “친구들이 많이 생긴 것”을 꼽았다. 개성이 뚜렷하고 성격이 활달한 친구들이 많아 학교생활이 무척 재미있다는 것. 하지만 처음 한국에 왔을 당시 자신을 주먹깨나 쓰는 사람으로 보고 덤벼드는 아이들 때문에 힘든 점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다니는 녹천중학교뿐 아니라 이웃 학교에서도 몇몇 아이들이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한번도 맞붙어 싸움을 벌인 적이 없다고.
“‘맞장 뜨자’는 아이들과도 늘 대화로 풀었어요. 이런 사정을 얘기했더니 선생님께서도 제가 잘하고 있는 거라고 칭찬해주시던걸요. 간혹 좀 논다는 친구들이 절 ‘짱’으로 삼고 싶다고 하지만 전 싫어요. 사실 운동하느라 걔들이랑 놀 시간도 없고요(웃음).”
여느 10대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명동 거리를 돌아다니고, 노래방에서 신나게 놀기도 하지만 그가 가장 즐겨 찾는 놀이터는 체육관이다.

한국의 ‘밀리언달러 베이비’ 꿈꾸는 16세 탈북 소녀 최현미

서울 녹천중학교 3학년인 최현미양은 여느 10대 소녀들처럼 연예인에 열광하고 다이어트에 관심이 많다.


가족들과 북한을 탈출하기 전까지 그는 여자 복싱 세계 챔피언 유망주로 기대를 한몸에 받는 권투선수였다.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하고, 어깨너머로 아버지가 즐겨 보던 외국 프로복싱 비디오를 보곤 했다는 그는 체육시간에도 뛰어난 운동신경을 발휘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복싱 코치의 권유로 2001년 9월부터 복싱을 시작하게 됐다고 한다. 평양 장원고등중학교에서 복싱을 시작한 지 석 달 만에 그는 4년 동안 권투를 한 선배를 이기는 놀라운 실력을 발휘했다. 북한 당국은 곧 그를 김철주사범대학 체육단에 배치했고, 그곳에서 최양은 대학생 등 30여 명의 선수와 붙어 주장선수만 빼고 모두 이겼다고 한다. 그의 탁월한 실력과 가능성을 높이 산 북한 당국에서는 그에게 매달 일반 근로자 월급 7배 수준의 장려금을 지급하고 세 명의 전문 트레이너를 붙여주는 등 특별 관리를 했다고.
“여기 와서 놀란 건 복싱을 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이 살을 빼기 위해 복싱을 한다는 사실이었어요. 진짜 여성 복싱 선수는 별로 없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여자 권투와 여자 축구를 많이 알아주거든요. 외국에 나가서도 우승을 많이 하니까요. 물론 북한에서도 여자가 권투를 한다고 하면 드세고 여자답지 못하다고 보는 경향은 있어요.”
지난해 7월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3개월간의 하나원 생활을 마친 후 곧바로 권투 연습을 재개했다.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나이라 얼굴을 맞으면 속이 상할 것도 같은데 그는 고개를 젓는다. “운동을 못하니까 맞는 거지 잘하면 맞을 일이 없다”며 “맞기 싫으면 상대보다 잘하면 된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한국 여자 권투선수 중 좋아하는 선수가 있냐”는 물음에 그는 주저하는 기색 없이 “김주희 선수”라고 대답했다. 이유는 단순 명료했다. 김주희 선수가 챔피언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전 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장정구씨로부터 지도를 받고 있다고 알려지면서 더욱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두 사람이 함께 훈련을 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지인을 통해 최양을 만난 적이 있는 장정구씨는 최양에 대해 “기본기가 탄탄한 훌륭한 재목”이라고 평가했다. 장씨는 특히 “2008년 올림픽 때 여자 복싱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며 “그때를 대비해 기량을 쌓으면 현미가 금메달을 목에 걸 수도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장씨는 경기도 분당에 곧 개관할 자신의 체육관에서 최양을 지도할 계획이라고 한다.
“저도 아직 현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밝고 때 묻지 않은 아이라는 건 알고 있어요. 최고의 선수가 되고 안되고는 나중 문제고 성품이 바르고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죠.”
최양은 장씨의 바람을 익히 알고 있었던 듯 자신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가장 싫다고 말했다. 지금 다니는 녹천중학교에는 자신 말고도 탈북한 아이들이 더 있는데 모두 그 사실을 숨기고 있어 안타깝다고. 평소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것까지 다 얘기해 선생님들이 걱정할 정도라는 그는 “자신에게 부끄러운 것보다 남에게 좀 창피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남매에게 ‘정직’을 강조했던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고.
챔피언 꿈 이루면 곧바로 은퇴해 영원한 챔피언으로 남고 싶어
그의 가족은 현재 월 1백20만원 정도의 정부 보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북한에서 번듯한 직장에 다녔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금까지 직장을 구하지 못해 대부분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듯했다.

한국의 ‘밀리언달러 베이비’ 꿈꾸는 16세 탈북 소녀 최현미

“아빠 엄마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거 아니까 제 마음도 아파요. 하지만 저도 제 생활이 있어서 부모님께 많이 신경쓰지는 못해요. 운동도 해야 하고요. 북한에서 ‘수재’로 불렸던 오빠는 지금도 공부에만 빠져 사는데 전 공부는 별로예요. 그런데 영어는 잘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지 아세요?”
영어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는 부모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혼자 고민만 하고 있다는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계를 풀고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보였다.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사연이 보도된 후 길에서 사람들이 알아보는 건 재미있지만 아직 한국에서 경기를 안 해본 상태라 관심이 부담스럽기도 하다고. 그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데 생각만큼 살이 잘 안 빠진다는 고민도 털어놓았다. 북한에 있을 때는 거의 하루 종일 운동을 했는데 지금은 오후에 2~3시간 운동하는 것이 전부여서 오히려 심적으로는 더 힘들다고. 그는 “체중을 줄이면 스피드가 좋아져 우승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꼭 살을 빼야 한다”고 야무지게 말했다.
처음 글러브를 낄 때부터 챔피언이 되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다는 최현미양. 한국 최고의 여성 복서가 되기 위해 기량을 갈고닦는 중인 그가 오래 망설인 끝에 조심스럽게 속엣말을 꺼내놓았다.
“챔피언 꿈 이루고 나면 저, 권투 그만둘 거예요. 정상에 올라서 그것 지키느라 방어전만 계속하다 쫓겨나듯 물러나기는 싫거든요. 제 생각에 챔피언은 정상에 선 순간 물러나야 해요. 그래야 영원히 챔피언으로 남을 수 있잖아요.”

여성동아 2005년 5월 4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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