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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아! 내 어머니|마음 속 고백

가수 김장훈이 방황 끝에 깨달은 어머니의 참사랑

‘자살 기도한 아들 위해 밤새 눈물 흘리며 기도한 어머니…’

■ 구술정리·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홍중식 기자 ■ 장소협찬·플라스틱(신사동)

입력 2005.05.10 15:49:00

최근 ‘조각’이란 새 앨범을 발표하고 활동을 재개한 가수 김장훈.
‘개그맨을 웃기는 가수’로 통하지만 젊은 시절 자살 기도를 했을 정도로 방황했다는 그는 당시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바로 어머니였다고 고백한다. 그가 방황의 끝에서 다시 일어서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해준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들려줬다.
가수 김장훈이 방황 끝에 깨달은 어머니의 참사랑

이번에 나온 나의 8집 앨범 타이틀은 ‘조각’이다. 문득 어느 방향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조각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과 매 한가지란 생각이 든다. 삶이라는 것도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안 보이는 것도 보이게 되고, 달리 보이는 것도 생기게 된다.
지난날의 내 삶을 돌이켜보면, 나는 어머니의 삶을 일방적으로 내 각도에서만 바라보고 어머니 속을 참 많이 썩이던 못난 아들이었다.
태어나서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어머니는 홀로 누나 둘과 나를 키우셨다. 우리 삼남매가 ‘아버지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들을까봐 어머니는 무척이나 엄하셨고,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를 많이 무서워했다.
왜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는지에 대해 어머니는 끝까지 말씀을 안 해주셨고, 나 또한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부모님이 하는 일이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 테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놔두고 할 수 있는 것만 열심히 해야 한다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게 더 현명한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버지와 같이 살지 않는 것에 대해 누구 탓을 하거나 원망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환경이 나에게 상처를 준 건 사실이다. 학창시절 학기 초마다 하는 가정환경 조사가 정말 싫었다. 선생님이 “아버지 없는 사람 손들어” 하는 그 순간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싶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하다.
사춘기 땐 어머니와 갈등 일으키며 수차례 가출
그런데 어린 나의 눈에 비친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우리들에게 미안해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와 참으로 많은 갈등이 있었다. 갈등이 커지고, 나의 반항심도 덩달아 커지면서 17세 때 처음으로 가출을 했다. 그 후로 수십 번도 더 넘게 집을 나갔다 들어가기를 반복했다.
스무 살 때는 자살을 기도한 적도 있다. 어린 나이에 집을 나가서 세상을 떠돌다 보니 낙도 없고, 집에 들어가자니 어머니와의 갈등이 두렵고, 뭘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2백 알이 넘는 수면제를 모아 한꺼번에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점점 정신을 잃어가다 ‘어, 이러다 진짜로 죽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두려워졌다. 그제야 괜히 먹었나 싶은 생각도 들고 어머니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다. 간호사가 위 세척까지 했으니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했다. 순간, 어머니 얼굴을 찾았지만 병원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끝내 오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밤새워 울며 나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렇게 엄하고 당당하던 어머니의 눈물을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 꽁꽁 얼어 있던 무언가가 스르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언젠가 어머니는 “나 때는 못 그랬지만 너는 좋은 여자 만나 행복해라”고 말씀 하셨다. 평생 아무 내색을 안 하셨어도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계셨을 어머니. 어머니의 고백을 듣고 그동안 어머니에게 가졌던 미움과 갈등이 풀어지면서 한없이 죄송스럽기만 했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의 사랑이, 내가 보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이 방황하던 나를 잡아주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가수 김장훈이 방황 끝에 깨달은 어머니의 참사랑

나에게 노래는 세상을 향한 외침 혹은 고함 같은 것이었다.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할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어머니는 내가 교수가 되기를 바라셨고, 처음에는 음악 활동을 반대하셨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대학에 들어간 후 본격적으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음악을 하니 비로소 사는 것 같았던 나는, 어느 날 아침 어머니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자고 일어나 눈을 뜬다는 게 이렇게 가슴 설레고 행복하다는 걸 이 나이 먹도록 몰랐다”고. 그러자 어머니는 “네 인생은 거기 있었구나” 하시며 드디어 음악 활동을 허락해주셨다.
내가 가수가 되도록 지지하고 도와준 사람이 바로 고(故) 김현식 형이다. 어머니와 현식이 형 어머니(나는 이모라고 부른다)는 친한 친구였다. 어머니가 이북 출신이라 친척이 없던 우리는 현식이 형네와 한가족처럼 오가며 지냈고, 형과 나는 자연스레 친형제처럼 자랐다. 현식이 형 집이 사업을 하다 망했을 때는 형이 우리 집에 와 있고, 또 우리 집이 안 좋을 땐 내가 현식이 형 집에 가 있곤 했다.
친형처럼 따르던 현식이 형이 죽고 형의 노래 ‘내 사랑 내 곁에’가 큰 인기를 얻자 방송국에서는 형과 음색이 비슷한 나를 찾았고, 나는 형의 노래를 대타로 부르면서 방송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그런데 내 인생이 잘 나갈수록 자꾸만 형의 죽음을 이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게 싫었고 형에게 미안했다. 결국 나는 생방송을 무단으로 펑크 내고 방송계를 떠났다. 그 뒤로는 쭈욱 대학로에서 공연만 하며 지냈다.
98년 ‘나와 같다면’이 담긴 4집 앨범으로 ‘김장훈’이라는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리기까지 7년을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살았다. 단 두세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를 부른 적도 있고, 리어카를 끌고 배추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한 적도 있다. 많이 힘들었지만 그런 때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는 것 같아 가끔 그때가 그립다.
그 당시 사업에 실패한 어머니는 보증금 5백만원에 월 6만원을 내는 단칸방에서 살고 계셨다. 하루는 큰누나와 작은누나가 “우리 둘이 모은 건데 네가 아들이니까 어머니한테 갖다드려라” 하면서 8만원을 주었다. 그런데 돈을 주던 작은누나가 “이거 네가 쓰지 마”를 3번이나 반복했고 순간 화가 나 나는 돈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작은누나가 울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계속 눈물이 났다. 이건 아니구나 싶었다. 한참을 생각하다 가족을 위해서 돈을 벌자고 결심했다. 그 길로 음반사를 찾아가 “방송 활동을 하겠다”는 것과 “성질을 부리지 않겠다”는 두 가지 약속을 한 후 4집 앨범을 냈다. 다행히 4집 앨범 이후 성공을 거두었다.
방황하는 수많은 청소년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에게 자랑스러운 아들 되고 싶어
2001년 ‘혼잣말’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고 나서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었다. 가족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것, ‘아, 가족이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돈도 명예도 인기의 끝도 모두 허망하지만 가족 간의 사랑만은 그렇지 않다.
그걸 알면서도 정작 나는 아직 내 가정을 꾸리지 않았다. 어느덧 30대를 훌쩍 넘겨버렸는데 말이다. 때론 너무 지긋지긋하면서도 편한 것이 있게 마련이다. 나에겐 혼자 있는 게 그렇다. ‘어린 시절’ 하면 ‘서늘함’과 ‘고독’이 떠오른다. 지금은 무척 건강하지만 사실 난 어린 시절 허약 체질이었다. 기관지염과 천식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툭 하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어머니가 일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병원에서 혼자였고, 집에 와도 혼자였다. 병원에 자주 들락거리는 바람에 친구가 없어 학교에서조차 혼자였다.

가수 김장훈이 방황 끝에 깨달은 어머니의 참사랑

김장훈의 어머니는 ‘십대 청소년을 위한 교회’ 목사로 일하고 계신다고.


그래서 어린 나이에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지기도 했다. 열살 땐가, 자전거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차와 부딪치면서 하늘로 몸이 붕 떠오르는 순간 ‘그냥 이대로 끝나버렸으면’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토록 혼자 있는 게 지긋지긋했는데 이젠 나도 모르게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고 익숙해져버렸다. 내가 연예계의 마당발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일이 없으면 대부분 집에서 혼자 지낸다. 혼자서 공연 생각을 하고 이것저것 공상을 하고, 인터넷 바둑을 즐기다 밤을 꼬박 새울 때가 많다.
이젠 혼자서도 외롭지 않다. 지긋지긋했던 과거의 내 외로움과 아픔이 담겨 있는 내 노래를 듣고 누군가 위안을 받을 수 있다니 행복하다.
4년 전 일산 대화동에 ‘십대 청소년을 위한 교회’를 세웠다. 어머니는 지금 그 교회의 목사님으로, 예전에 방황하던 이 아들을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지금도 수많은 청소년을 위해 기도하고 일하신다. 어머니는 이제 나만의 어머니가 아닌 방황하는 모든 아이들의 어머니인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자랑스럽고 나 또한 자랑스런 아들이 될 것을 약속드리고 싶다.

여성동아 2005년 5월 4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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