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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진 시골 마을에서 TV 영어 방송으로 ‘영어 신동’ 된 열세 살 중학생 박은미

■ 글·구미화 기자 ■ 사진·정경택 기자

입력 2005.05.02 17:04:00

강원도 강릉 시내에서 시외버스로 1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외진 시골 마을에 사는 한 여중생이 학원에 다니기는커녕 영어사전 한번 들여다본 적이 없는데도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화제다.
지난해 가을부터 위성방송의 디즈니 만화와 시트콤을 즐겨본 것이 영어와 친해진 유일한 비결이라고 말하는 열세 살 박은미양을 만나보았다.
외진 시골 마을에서 TV 영어 방송으로 ‘영어 신동’ 된 열세 살 중학생 박은미

강릉시 성산면, 강릉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마을이 요즘 떠들썩하다. 이 마을에 사는 중학교 1학년 박은미양(13)이 ‘영어 신동’으로 불리며 각종 매스컴을 타고 있기 때문. 올해 전교생이 25명에 불과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된 박양은 집에 영어사전이나 영어 교재 하나 없는데도 영어로 방영되는 만화와 시트콤을 자막 없이 이해하고, 자기 생각을 영어로 자유롭게 표현한다. 지난 2월엔 강릉에서 열린 국제 피겨스케이팅 대회에 통역 자원봉사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지난 4월 초 박양을 만났을 때 박양은 그날 하루 있었던 일들과 자신의 기분을 막힘없이 영어로 말했다. 어려운 단어나 복잡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년간 영어 공부를 하고도 영어로 말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점을 감안하면 박양의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박양에게 “어떻게 영어를 잘하게 됐냐”고 묻자 난감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생각을 하면 그것이 영어로 머릿속에 떠오른다”는 것. 고개를 갸우뚱하며 박양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자 옆에 있던 어머니 정선녀씨(57)가 말문을 열었다.
“TV를 보면서 뭐라 중얼중얼하더라고요. 영어로 된 만화를 보고 와서는 내용이 어떻다느니 하고 자꾸 떠들기에 처음엔 시끄럽다며 저리 가라고 했어요(웃음). 근데 아홉 살짜리 손녀가 은미랑 만화를 보면서 한글 자막을 가리고 지금 뭐라고 하는 거냐고 물으니까 은미가 대답을 하는데 손을 치우고 보니 그게 딱 맞더라고요. 그래서 깜짝 놀랐죠.”
평소 위성방송에서 하는 외국 만화와 시트콤을 즐겨보던 박양은 지난해 말 무렵부터 TV를 보며 영어로 말을 하고, 슈퍼마켓에서 어머니 정씨에게 물건들을 가리키며 영어로 설명해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한 달에 한 번 학교에 원어민 교사가 찾아와 발음 교정을 해준 것이 영어 공부의 전부였던 그의 입에서 영어가 술술 나오자 가족들은 “영어 신이 들렸다”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 달에 한 번씩 영어 수업을 하긴 했는데 그때는 재미가 없었어요. 반에서 제가 가장 영어를 못했고요.”
그랬던 그가 영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지난해 10월, TV 채널을 돌리던 중 우연히 위성방송의 디즈니 채널을 보게 되면서부터다.
“TV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자막이 없는 디즈니 만화를 보게 됐는데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궁금하더라고요. 시트콤도 그렇고요. 몇 번 봤는데 언제부턴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더라고요. 조금 더 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면 그게 영어로 자꾸 머릿속에 떠오르고요.”
“영어에서 자신감 얻은 뒤로 다른 과목 공부에도 흥미 갖게 됐어요”
만화와 시트콤에 나오는 대사를 유심히 듣고 입으로 따라 하며 기억하려고 했다는 그는 2~3달이 지나자 TV를 보면서 다음 대사를 예측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고 한다.
“TV에 나오는 사람들의 눈을 가만히 보면서 대사를 따라 하다 보면 마치 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아요. 그래서 TV에서 누가 어떤 질문을 하면 다른 배우가 대답하기 전에 제가 먼저 말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조카가 옆에서 ‘저 사람이 이모 말 따라 한다’ 그래요(웃음).”
더욱 놀라운 건 박양이 일본어와 러시아어도 할 줄 안다는 점이다. 초등학교 시절 한 달에 한 번씩 발음 교정을 해주던 원어민 교사를 통해 한 일본인을 알게 됐는데 교사의 딸이 일본인과 대화하는 것이 부러워 유심히 듣고 따라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간단한 의사소통은 할 수 있게 됐다고. 러시아어도 비슷한 방법으로 습득했다. 지난해 박양의 집에 한동안 러시아 노동자들이 머물렀는데 그들의 대화를 듣고 발음이 독특한 러시아어에 흥미를 느껴 며칠 동안 러시아 노동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것.
“며칠 뒤에 용기를 내서 먼저 영어로 ‘내가 하는 말이 틀리더라도 웃지 말고 가르쳐달라’고 말한 다음에 간단한 말을 해봤어요. 그랬더니 맞다고 하더라고요(웃음).”

외진 시골 마을에서 TV 영어 방송으로 ‘영어 신동’ 된 열세 살 중학생 박은미

고향 마을에서 ‘영어 신동’으로 불리는 박은미양은 미국에 가서 영어로 실컷 말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그 후로 박양은 러시아 노동자들과 가족들 사이에서 통역을 했다고 한다. 박양의 러시아어 실력은 유창한 정도는 아니지만 본국으로 돌아간 러시아인들에게 안부 전화를 할 정도의 수준은 된다고.
그러나 일본어와 러시아어 모두 쓰거나 읽지는 못한다. 단지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영어도 비슷하다. 초등학교 때 배워 알파벳과 간단한 단어를 ‘볼’ 줄은 알지만 읽거나 직접 쓰는 건 말하는 것만큼 잘하지 못한다는 것. 박양에 따르면 ‘apple’이라는 단어를 보면 그 모양새를 보고 ‘사과’라는 것을 짐작해 말할 뿐 철자를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박양은 요즘도 하루 1시간 정도 위성방송 스카이라이프에서 방영 중인 ‘댓 소 레이븐’ ‘리즈 맥과이어’ 등의 시트콤과 어린이 만화를 시청하는 게 유일한 영어 공부다. 영어 듣기 실력이 늘면서 최근엔 ‘스위트 박스(Sweet Box)’의 ‘Sorry’ 등 팝송도 즐겨 듣는데 모든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대충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어린이 채널을 주로 보다 보니 단문 위주로 말하고, 읽고 쓰는 건 거의 못하지만 우리말을 배울 때도 말부터 배우고 읽고 쓰기는 나중에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박양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외국어를 익히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박양은 영어를 잘하게 되고, 러시아어와 일본어도 ‘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후로 다른 공부에도 흥미가 생겼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보통 80~85점 정도 받았는데 마지막 시험에서 평균 95.6점을 받았어요(웃음).”
영어 실력으로 어린 나이에 세인의 관심을 모은 박은미양. 하지만 영어에 더 큰 욕심은 없다며 지금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영어 말하기를 즐기며 생활할 생각이라고 한다. 어머니 정씨도 영어에 대해서만은 딸의 생각에 맡기겠다고.
강릉에서 열리는 6월 단오제 때도 통역 자원봉사를 할 생각이라는 박양은 “외국인만 보면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고 한다. “미국에 가서 외국인과 실컷 말해보는 것이 소원”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여성동아 2005년 5월 4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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