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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역경을 딛고

색약·아픈 가족사·음란물 시비 딛고 꿈과 행복을 그리는 만화가 이현세

■ 기획·최호열 기자 ■ 글·백경선‘자유기고가’ ■ 사진·김성남 기자

입력 2005.04.11 11:18:00

한국 만화계의 거장 이현세 화백. 그에게도 색약으로 인해 화가의 길을 포기해야 하고, 아픈 가족사로 3년을 방황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더욱이 야심작 ‘천국의 신화’의 음란물 시비로 가족들까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런 아픔을 딛고 한국 만화계의 거장으로 우뚝 선 그의 인생역정을 들어보았다.
색약·아픈 가족사·음란물 시비 딛고 꿈과 행복을 그리는 만화가 이현세

“저는 너무나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사람이에요. 이런 성격이 꿈을 만드는 제 직업과 잘 맞는 것 같아요.”
1980년대 초 ‘공포의 외인구단’으로 한국 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연 만화가 이현세(49). 그가 만화를 그린 지 어느덧 28년이 됐고, 그동안 그린 만화를 책으로 엮으면 무려 1천8백여 권 정도가 된다고 한다.
이현세를 만나기 위해 그의 화실을 찾았을 때 6층 건물 맨 꼭대기에 자리 잡아 뾰족한 모양의 천장이 인상적인 그의 화실은 조용했다. 화실이 너무 조용한 게 아니냐고 하자, 그는 조용해서 집중이 잘되고 좋다고 한다.
“예전엔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서 음악 소리라도 있었는데, 김건모의 ‘핑계’ 이후로는 그마저 없앴어요. 가사가 귀에 안 들어오니 신경이 쓰이고 신경을 쓰다 보니 작업에 몰두할 수가 없더라고요.”
그는 집중력과 지구력이 뛰어난 것으로 소문나 있다. 만화를 한번 그리기 시작하면 밤낮을 잊고 온몸의 힘이 다 소진될 때까지 며칠이고 자리를 뜨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엉덩이에 종기를 달고 산다고 털어놓는다.
“신명이 났을 때 잠을 자면 그 다음 날 일어나 다시 그리려고 해도 그 감이 안 와요. 그래서 그 느낌을 놓치고 싶지 않아 쉬지 않고 쭉 그리던 것이 습관이 된 거죠. 이두호 선생님은 ‘만화가는 엉덩이로 만화를 그린다’고 강의하시면서 무거운 엉덩이의 대표가 저라고 학생들에게 말씀하셨대요.”
그의 엉덩이는 만화를 그릴 때뿐만 아니라 술자리에서도 아주 무겁다고 한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한번 앉으면 술자리에서 쉽게 일어나는 법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때 그가 영화 ‘귀천도’의 고문 역할을 맡으면서 알게 된 배우 김민종도 그와의 술자리에서 도망간 일을 고백한 적이 있다. 김민종도 영화계에서는 알아주는 주당이다.
“이른 저녁에 시작해 다음 날 아침까지 밤새 술을 드시는데, 제가 어느 순간에 더 이상 이 자리에 같이 있다가는 죽겠다 싶어 조용히 집으로 사라진 적이 있어요. 그땐 저도 누구 못지않게 술을 마실 땐데, 정말 못 당하겠더라고요.”
그의 휴대전화 액정화면에는 “아빠 이제 그만 ♡”이라고 쓰여 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큰딸이 떠나기 전에 그에게 술과 담배를 끊으라고 당부하며 그렇게 저장을 해놓고 갔다고 한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술과 담배를 즐기고 있다.
“젊었을 땐 제 재능이나 노력이 만화를 그리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술하고 담배가 제 만화를 그려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웃음).”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고방식으로 인생의 큰 시련 견뎌내
지난 97년, 우리 민족의 탄생 신화를 다룬 작품 ‘천국의 신화’가 외설 시비에 휘말려 그가 청소년보호법 위반으로 기소된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차라리 작가 생활을 그만두고 연필을 놓는 것이 낫다”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아울러 아이들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그리고 그 싸움은 2003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될 때까지 6년이나 지속되었다.
그는 “3백만원 벌금 안 내려고 6년 동안 들어간 변호사비가 무척 많다”고 말하지만 이 일로 인해 진짜 잃어버린 것은 ‘신명’이었다고 한다.

색약·아픈 가족사·음란물 시비 딛고 꿈과 행복을 그리는 만화가 이현세

이현세씨는 미대 진학 꿈이 색약으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만화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만화가는 신명으로 작업을 하죠. 그런데 그 신명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천국의 신화’는 원래 발해사까지 다루며 1백 권으로 기획된 대하물인데 단군까지 그 내용을 절반으로 축소해 50권 정도에서 끝낼 겁니다. 사실 지금이라도 끝내고 싶은데 독자들과의 약속 때문에 연재를 계속하는 거예요.”
재판을 하는 동안 그는 협심증까지 생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많이 힘들었을 텐데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고 묵묵하게 견뎌준 가족들이 있었기에 6년간의 그 길고도 지루했던 싸움을 버텨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 당시 아이들이 아직 어렸을 때라 많이 괴로웠을 거예요. 학교 가면 친구들이 ‘니네 아버지 음란 폭력 작가로 잡혀갔다며?’ ‘니네 아버지 만화가 그렇게 야하다며?’ 하는데 자기들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어요. 그런데도 아이들은 제가 집에 가면 거의 독립투사가 들어오는 것처럼 저를 맞이해줬어요. 그런 아이들이 저에게는 정말 많은 힘이 됐죠.”
‘공포의 외인구단’이 한창 인기를 얻고 있던 83년에 태어난 둘째 딸 이름이 엄지라고 한다. 사실 결혼할 때부터 딸을 낳으면 엄지라고 하려고 했는데, 큰딸은 그의 어머니가 작명소에 가서 이름을 지어오는 바람에 결국 둘째 딸에게 엄지란 이름을 지어주게 됐다는 것. 엄지양은 지금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하고 있다. 광고회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다 일본에 유학 가 있는 큰딸 또한 회화를 전공했고, 고 3인 아들도 현재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만화가 친구의 여동생인 아내도 결혼 전까지는 애니메이션 일을 했다고 하니 부모의 재능을 아이들이 그대로 이어받았나보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늘 상을 받았다는 그의 꿈은 사실 만화가가 아닌 화가였다고 한다. 그런데 미대에 지원서까지 낸 상황에서 자신이 색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색약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그래서 사흘을 내리 술만 마시다가 ‘만화는 흑백이니까 만화가가 되라는 계시인가 보다’ 생각했어요. 워낙 제 성격이 낙천적이라….”
색약 때문에 화가의 꿈을 포기해야만 했을 때도 사흘만에 훌훌 털고 일어난 그를 자그마치 3년 동안 방황하게 만든 시련이 있었다.
“아들이 없는 큰집에 양자로 왔다는 사실을 스무 살 때 처음 알게 됐어요.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배신감 내지는, 남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몰랐다는 소외감에 굉장히 방황했어요. 한 3년을 집에 내려가지 않았죠.”
그러다 군대에 가서 보초를 서며 많은 생각을 했고, 문득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어머니도 두 분이고, 형제도 남들 두 배여서 좋은 거 아니냐고. 이처럼 그는 살면서 그에게 찾아온 크고 작은 시련들을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자신의 성격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됐을 때 친어머니에게 “저는 여태까지 저를 낳아준 어머니도 모르고 살았다”며 “그런 제 기분 아냐”고 따지듯 말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저도 어머니의 심정을 알지 못했죠. 제가 딸이라도 결혼시켜 보내면 아들을 큰집에 보내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백분의 일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요.”
그는 7년 전 큰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상을 치르고 나서야 처음으로 낳아준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불러봤다고 한다. 그 전엔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큰어머니 때문에 그렇게 불러볼 수가 없었다고.

색약·아픈 가족사·음란물 시비 딛고 꿈과 행복을 그리는 만화가 이현세

그는 7년째 세종대 영상만화학과에서 강의를 해오고 있는 교수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그는 만화가와 교수 말고 또 다른 직함을 하나 더 얻었다. 지난 1월 한국만화가협회 신임 회장에 취임한 것이다.
“요즘 만화시장이 어렵잖아요. 3년간 최선을 다해 ‘봉사’할 생각이에요. 오랜 기간 사람들에게 사랑받은 만큼 돌려 드려야죠. 팬들에게나 만화 관련 종사자들에게 모두에게요.”
그런데 회장이 된 요즘, 그는 양복을 입어야 하는 것부터 시작해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하는 등 시간을 조절해야 하는 것이 제일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예전엔 화실에 나와 작업을 하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포장마차에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 비디오를 몇 편 빌려 집에 들어가 새벽까지 봤어요. 그러다 에너지가 바닥나면 쓰러져 잠이 들곤 했어요. 오죽하면 아내가 ‘무슨 사람이 휴대전화기도 아니고 배터리가 나가야 잠을 자냐’고 그랬어요. 그런데 이젠 그러질 못해요. 오전 7시에 문화관광부에 들어가기도 하고 조찬 모임도 있고 하니까 일찍 잠을 청해야 하죠. 젊은 회장이 공식 석상에서 졸거나 하면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요.”
마감으로 쫓기는 중에도 술자리가 아쉬워 새벽까지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 밤 12시에 친구가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해도 주저 없이 나가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저당 잡힌 그는 “3년만 죽으면 된다”며 웃는다. 이번에도 역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고방식이 작용을 했다.
그는 회장 활동이 끝나는 3년 후엔 화실 문을 닫을 생각이라고 한다. 지금 하고 있는 연재가 끝나면 더 이상 다른 연재는 안 할 생각이라고.
“쫓기는 삶이 주는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에요. 3년 후엔 진정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그동안은 술 마시는 밤에만 저 개인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때는 개인 이현세로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싶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그의 꿈은 ‘좋아하는 만화 실컷 보고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만화가게를 운영하면서 정육점 주인 딸하고 결혼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그는 “좋아하는 만화를 그리면서 고기 외에도 먹고 싶은 건 얼마든지 다 사 먹을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아직도 모든 걸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어 정말 행복하다”며 세상 사람들 모두 자신만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여성동아 2005년 4월 4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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