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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leb 굴곡진 인생

조폭 두목에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사업가 이상훈씨의 솔직한 고백

“70년대 톱 탤런트와의 불같은 사랑, 호형호제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숨은 인연 처음 밝힌다”

■ 글·최호열 기자 ■ 사진·김형우 기자

입력 2005.03.10 17:11:00

영화보다도 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있다. 명문대 출신 조폭 두목으로 81년 법정에서 탈주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12년 만에 출옥한 뒤에는 노점상에서 시작해 보석사업가로 성공한 이상훈씨가 주인공. 현재 인권운동가, 사회사업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가 털어놓은 인생역정과 인기 탤런트와의 불같았던 사랑, 70년대 초 호형호제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과의 숨은 인연 독점 공개.
조폭 두목에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사업가 이상훈씨의 솔직한 고백

지난 2월12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일대가 술렁거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수십 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교보문고에서 영풍문고까지 열을 지어 서 있었던 것. 지나던 행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이다.
이런 진풍경이 벌어진 이유는 교보문고와 영풍문고에서 60, 70년대 영등포 일대를 평정했던 ‘대호파’ 보스 이상훈씨(55)가 최근 펴낸 ‘코리안 마피아’의 저자 사인회가 잇따라 열렸기 때문이다. 명문대생에서 조직폭력배 두목으로, 12년 만에 출소한 후에는 노점상에서 수십억원을 주무르는 보석사업가로, 인권운동가로, 사회사업가로 변신을 거듭한 그의 삶은 영화보다도 더 드라마틱하다.
종로3가 보석상가에서 만난 그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깔끔한 외모, 잔잔한 말투의 소유자로 조폭 두목의 험악한 느낌은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날카로운 눈매와 손과 발 곳곳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에서 험난했던 과거를 엿볼 수 있었다.
해방촌, 영등포 빈민가 등에서 자란 탓에 일찍부터 주먹에 눈을 떴던 그는 한집에서 큰아버지라고 부르며 자란 전설의 주먹 시라소니가 인정했을 정도로 싸움에 재질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공부도 곧잘 해 고입 본고사가 있던 당시 명문고에 입학했고 날마다 싸움을 하면서도 명문대에 합격할 정도였다고.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학교에 가기 위해 영등포시장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무리가 여자를 상대로 소매치기를 하는 게 보였어요. 그 자리에서 소매치기 대장을 때려눕혔죠. 그게 인연이 되어 이들의 두목이 되면서 영등포 폭력계에 진출하게 되었어요.”
박 대통령이 하사한 시바스리갈 나눠 마시며 호형호제하던 전두환 전 대통령
싸움을 위해 대학까지 그만둔 그는 본격적으로 암흑가에서 활동했다. 당시 암흑가에서는 어느 정도 크면 유흥업소 지배인이 되는 게 관례였다. 당시는 이런 곳 외에는 마땅히 돈 나올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20대가 되면서 당시 대형 유흥업소인 김포공항 가는 길에 있던 에어포트 호텔 지배인이 되었다. 그곳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70년대 초 어느 날, 에어포트 호텔 맞은편에 있던 공수여단의 장교가 찾아와 “저희 어른께서 놀러 오시면 잘 부탁한다”고 말한 뒤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장교가 ‘모시고 온’ 이가 당시 공수여단장인 전두환 준장이었다고.
“인근에 유흥업소가 그곳밖에 없어서인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찾아오셨어요. 저도 특별대접을 했죠.”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형님 동생 하고 지낼 정도로 친해졌다고 한다.
“어느 날 절 부르더니 시바스리갈을 한잔 따라주더라고요. 시바스리갈을 즐겨 드셨던 박정희 대통령이 마시다 남은 걸 하사하셨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박 대통령이 전 장군을 무척 예뻐했다고 해요.”
그는 명절이면 전 전대통령 집에 찾아가기도 했는데, 장남 전재국씨에겐 태권도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호형호제하던 두 사람은 훗날 우연히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악연으로 바뀌었다. 80년 신군부가 들어선 후 그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
“당시 전 수배될 이유가 없었어요. 그래서 아는 경찰을 통해 알아보니까 더 높은 곳에서 지시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조폭 두목에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사업가 이상훈씨의 솔직한 고백

‘귀천’을 운영하는 고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가 이씨의 팬사인회를 찾아 축하하고 있다.


결국 그는 81년 밀고로 격투 끝에 검거되었다. 그는 밀고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법정에서 교도관을 인질로 잡고 탈주극을 벌이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에게 현상금 3천만원과 함께 사살명령이 내려졌다.
탈주 후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가족과 지인들은 큰 고초를 겪었다. 형제는 물론 사촌들까지 심하게 고초를 겪어 모두 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을 정도. 결국 그는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검사에게 전화해 다른 사람들을 모두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수를 했다고 한다.
그는 조폭 보스로 명성을 떨치던 74년부터 76년까지 인기 탤런트와 뜨거운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74년 당시 몇 가지 사건에 연루돼 도피생활을 하던 그는 절친한 친구가 영업부장으로 있는 나이트클럽에 숨어 지냈는데, 우연히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희연’(가명)이라는 신인 탤런트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희연은 가족이 모두 외국으로 이민을 가고 혼자 남아 방송활동을 하던 터라 외로웠기 때문인지 친오빠처럼 보살펴 주는 그에게 쉽게 마음을 내주었고, 이내 희연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했다고.
2년 동안 인기 탤런트와 동거하며 뜨거운 사랑 나눠
“희연이는 제가 조폭생활을 청산하도록 자신이 번 돈으로 식당까지 차렸어요. 새 출발을 하자며 울며 매달렸죠.”
하지만 그는 조폭생활을 하는 자신 때문에 늘 희연이가 걱정이었다고 한다. 자신과 동거한다는 사실이, 더구나 조폭 두목과 동거한다는 게 밝혀지면 그녀가 큰 타격을 입을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이미 탤런트로서 인기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또한 그녀가 다른 조직에 표적이 되어 납치될 위험성도 있었다. 결국 그는 희연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일본으로 밀항을 감행했다. 그리고 1년 동안 숨어 지내다 귀국할 무렵 희연이가 아이를 유산한 후 마음을 정리하고 사업가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에게 희연이가 누구냐고 묻자 “그를 위해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저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요. 저에겐 지금 하늘이 주신 사람인 아내가 있거든요. 그래도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어요. 희연이가 잘 살았으면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파요.”
희연이가 가정적으로 불행을 겪은 것 같아 안타깝다는 그는 희연의 존재에 대해 요즘도 종종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중견 탤런트라고 귀띔해 주었다.
12년 동안의 감옥생활은 그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왔다. 조폭이던 그는 강력범 방에 수감되어야 하지만 다른 강력범들과의 격리 차원에서 시국사범 방에 수감되었는데, 그곳에서 또 다른 세계를 본 것.
“당시 시국사범들은 매일 전두환 퇴진과 민주주의 쟁취, 김대중 석방을 위해 농성을 벌였어요. 특히 한밤중에 시국사범들이 동시에 각자의 방에서 전두환 퇴진,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쇠창살을 식기로 드르륵드르륵 긁으면 그 소리가 교도소를 넘어 찻길까지 울려퍼졌어요. 그러면 전부 독방에 가두는데 그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어요. 그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고요. 도대체 누구를 위해 그렇게 싸우는 것인가 궁금해 그들이 빌려주는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대학생들이 빌려준 사회과학 서적을 통해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그는 당시 함께 교도소 생활을 했던 시국사범들이야말로 하늘이 보낸 스승이라고 했다.

조폭 두목에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사업가 이상훈씨의 솔직한 고백

“그분들을 꼭 만나고 싶어요. 제가 쓴 책을 보면 꼭 연락을 해주면 좋겠어요.”
그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틈틈이 영어와 일어도 함께 공부했다. 타자의 필요성을 느끼고 종이에 자판을 그려 타자 연습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역에 관심을 갖고 관련 서적은 물론 무역신문을 탐독했다. 그 모든 것이 그가 오늘날 사업가로 성공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93년 12월25일 오랜 수형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온 그는 더 이상 조폭 두목 이상훈이 아니었다. 과거를 청산하고 맨 손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처음엔 사회의 혹독함을 톡톡히 맛봤어요. 무역신문에서 시중에서 15만원 하는 고급시계를 개당 5천원에 판다는 광고를 보고 그걸 팔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에게 빌린 2백50만원으로 그걸 사서 역전에서 좌판을 벌여 1만5천원에 팔았죠. 그런데 온종일 한 개도 안 팔리는 거예요. 가만 보니까 옆에서 똑같은 시계를 3천원에 팔고 있더라고요. 속아서 산 거죠. 제게 시계를 팔았던 사람을 찾아가니까 자긴 판 적 없다며 생떼 쓰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옛날 같았으면 주먹이 나갔을 텐데 참았죠.”
그렇게 속아가며 하나씩 세상을 배워갔다. 노점을 하다가 경비들에게 쫓겨나는 등 옛날엔 상상할 수도 없는 곤욕도 무수히 겪었다. 그런데 그게 즐거웠다고 한다. 구찌 가죽옷을 입고, 최고급 벤츠를 타고 다니던 조폭 두목 시절에는 맛볼 수 없었던 행복을 느꼈다는 것.
노점상을 하던 그는 중국의 싼 물건을 사다 한국에 가져와 팔면 이익이 쏠쏠하게 남는다는 걸 알고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중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소매치기들에게 돈은 물론 여권까지 다 털리기도 했는데 그런 경험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가발시장에 뛰어들기도 했다.
“제가 감옥에서 고초를 겪으면서 머리가 많이 빠져서 가발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중국 시장엘 다니다 깜짝 놀랐어요. 우리나라에선 15만원 하는 가발이 중국에선 1만원이면 살 수 있더군요. 물론 디자인과 질은 떨어졌지만 우리나라에서 디자인과 기술을 가져다 만들게 하면 될 것 같았어요. 당시 가발이 유행할 때라 엄청난 수익을 올렸죠.”
가발사업이 시들해질 무렵 우연히 보석상을 하는 선배와 함께 러시아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다이아몬드 수입을 거래하는 자리에 동석하게 되었다.
노점상에서 시작해 굴지의 보석사업가로 성공
“가만히 앉아서 듣다 보니까 보석중개상이 선배에게 하는 말과 현지 보석상에게 영어로 하는 말이 다른 거예요. 선배가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니까 자기 마진을 30% 넘게 챙기더군요. 그걸 보면서 ‘아,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보석상들이 영어를 못하니까 이렇게 새나가는 돈이 많다는 걸 안 거죠.”
그는 당장 러시아 현지의 보석 값을 조사했다. 그리고 감옥에 있으면서 익힌 영어와 무역지식을 바탕으로 종로3가의 보석상들에게 현지 시세에서 10%의 마진만 받고 수입을 대행해 주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1년의 절반 이상을 미얀마, 태국, 콜롬비아, 페루, 남아프리카공화국, 러시아 등 세계 각지의 보석 원산지들을 돌아다녔다.
그는 보석 수입에 그치지 않고 핵진주를 개발하고, 대형 매장을 빌린 후 이를 쪼개 보석 디자이너에게 나누어 대여해주는 주얼리 상가를 개발했다. 수입, 제조, 판매를 모두 장악한 보석사업가로 자리잡은 것이다.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그는 마음속에 품어왔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가 감옥에 있던 84년, 수감 중이던 박영두씨가 교도관에게 무참하게 폭행당해 사망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와 함께 조사를 하는 등 수년간에 걸친 노력 끝에 2001년 6월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혀냈다.

조폭 두목에서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사업가 이상훈씨의 솔직한 고백

이씨는 현재 보석 수입, 제조, 판매를 모두 하는 보석사업가로 성공했다.


지난 10년 동안 그가 번 돈은 대략 50억원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현재 그가 가진 돈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사회에 환원했기 때문이다. 박영두 살해 진상조사, 5·6공 피해자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은 물론 재소자돕기, 윤락녀 자활운동, 청각장애인 등 소외 계층을 돕는 데 앞장섰다. 북한어린이돕기에도 관심을 기울여 지난해엔 용천폭발 피해 어린이 모금운동과 남북 사랑의 빵 나누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윤락녀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해요. 윤락금지법만 만들어 놓고 이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더 나쁜 길로 빠질 뿐이죠. 특히 최근 홍콩 윤락가에서 노예처럼 살고 있는 우리나라 여성들이 많아요. 이들에 대한 보호대책이 시급해요.”
그는 수감생활이 인생의 전환기였다면 지금의 아내는 삶에 희망을 준 한줄기 빛이라고 말한다. 94년 담임 목사의 주선으로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과거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호감을 느끼면서도 차마 과거를 밝힐 수 없었다고.
“결혼 이야기가 오갈 때 비로소 과거를 솔직히 고백했어요. 처음엔 놀라는 눈치였지만 두 가지 약속을 전제로 결혼을 받아들이더라고요. 하나는 과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이 되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자신 있다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당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죠.”
그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한다. 비록 가진 것이 없어 결혼식조차도 올리지 못하고 어렵게 시작했지만 부부싸움 한번 하지 않고 서로 의지하며 사는데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귀여운 두 딸까지 있기 때문이라고. 그림을 그리는 아내는 지난해 대한민국 국전에 입상할 정도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아내는 혹시라도 가족이 상처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가족이 언론에 노출되는 걸 반대해요. 또한 누구의 아내이기보다 한 사람의 화가로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요.”
그에게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고 한다. 아내와 같이 산 지 1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것. 처음엔 먹고사는 데 바빠서, 그 후엔 박영두 사건 진상 규명과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데 신경 쓰느라 미처 아내를 챙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이제 와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쑥스럽다’고 하면서도 아내에게 면사포를 씌워주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내비쳤다.
끝으로 그는 “힘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인권까지 짓밟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책으로 펴낸 이유도 ‘이상훈’이라는 인간의 영웅담이나 고뇌, 눈물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재소자, 윤락녀 등 소외된 자들이 어떻게 인권유린을 당하는지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여성동아 2005년 3월 4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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