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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기사

유인경의 Happy Talk

총이나 칼보다 더 무서운 말 말 말…

2004. 02. 03

독기를 품은 말 한마디가 남긴 상처는 두고두고 사람을 병들게 한다. 거친 말이 오고가는 격렬한 말다툼은 물론이고, 가족끼리 주고받는 사소한 투정, 친구간에 무심코 던진 농담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특히 말 많은 나의 경우 수없이 독설과 폭언을 퍼부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비수를 꽂지 않았을까. 앞으로는 입이 근질근질해도 꾹 참기로 했다. 대신에 수시로 칭찬과 감사의 말을 해야겠다.

총이나 칼보다 더 무서운 말 말 말…

총이나 칼은 순식간에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다. 하지만 독기 어린 사람의 말은 두고두고 조금씩 사람의 생명을 잠식한다. 천둥과 번개는 한꺼번에 몰아치는 법. 최근에 황당하고 당혹스런 일들을 동시다발로 겪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보다는 서로 오가는 말들에 더욱 상처를 받았다. 그 말을 통해 상대방이 나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었고, 얼마나 나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는가를 확인하게 되었다. 그건 다시 내게 또 다른 상처를 주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서 “어머, 그러셨군요. 제가 그렇게 이상하고 나쁜 인간이었군요. 반성하겠습니다” 하거나 “그건 정말 오해랍니다. 제발 진실을 알아주세요. 사실은…” 하고 해명할 수가 없었다. 물론 처음엔 ‘귀가 왜 두개인가, 듣고 흘리라고 두개이지’ 하며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곧 마음속의 까만 악마가 이렇게 속삭인다.
“왜 가만히 있어? 왜 말을 못해? 너 말 잘하잖아. 게다가 저쪽은 자기 주제도 모르고 저렇게 기세 등등해서 자기 입장만 이야기하는데 왜 멍청하게 듣고만 있어? 너 바보야? 억울하지도 않아? 그 잘하는 말로 속시원히 퍼부어봐.”
그래서 결국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과장되게 상대방의 약점이나 잘못한 점을 비판하고 만다. 그러면 상대방은 파르르 떨며 더욱 적나라한 언어로 강도를 높여 나에게 맞선다. 덕분에 내 신경세포는 엄청나게 손상되고, 수명 역시 최소 몇 달은 감소되는 것 같다. 물론 상대방은 나 때문에 수명이 몇년은 줄어들었을 테지만 말이다.

때로는 이성적인 충고보다 애정이 담긴 위로의 말이 더 힘이 돼
이렇게 격렬한 말싸움이 아니어도, 때론 사소한 불만이 비수가 되어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아주 열성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맹렬 ‘슈퍼우먼’이다. 아들의 공부도 직접 지도해줄 정도이고, 휴일이면 근사한 특별 간식을 만드는, 정말 나와 대조되는 좋은 엄마다. 얼마 전 그가 힘든 심경을 털어놓았다.
“난 요즘 정말 온몸이 스트레스 덩어리야. 어제도 온 가족들을 상대로 싸우느라 녹초가 됐어. 방학이라고 잠만 자는 아들을 불러놓고 ‘공부 좀 해라, 기말고사도 그렇게 망쳐놓고. 넌 왜 그렇게 단세포냐’라고 했더니 ‘단세포의 자식이니까 그렇죠’ 이러는 거야. 깜짝 놀라 ‘말버릇이 그게 뭐냐, 넌 공부보다 인격 수양이 시급하구나’ 했더니 ‘그러는 엄마부터 말 좀 조심하세요. 엄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상처받는 줄 아세요’ 하며 울먹이더라.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까지 나를 응원해주기는커녕 ‘맞아, 당신 말투는 정말 문제가 많아’하며 거들더라고. 내가 나무라는 게 아니라 훌륭한 인간 되라고 충고해주는 건데도 날 마치 마귀할멈이나 잔소리꾼으로 아니 너무 속상해.”
나도 그렇다. 딸아이가 어쩌다 나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을 때 보면 난 당장 엄마 노릇에 사표를 써야 할 것 같다. 무심하고, 약속도 안 지키고, 대책도 없는 엄마이니 말이다.
농담으로 한 말조차 때론 엄청난 오해와 상처를 낳을 수 있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이혼한 뒤 오히려 얼굴이 밝아 보이는 이가 있기에 다른 친구를 만나 무심코 “와, 그 친구는 정말 이혼하길 잘했더라. 어쩜 이혼한 뒤로 그렇게 예뻐지고 활기차졌니. 진작 이혼할 걸 그랬어” 하고 말했다. 그랬더니 곧바로 당사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총이나 칼보다 더 무서운 말 말 말…

“어쩜 그러실 수 있어요. 제가 진작 이혼해야 했다니요. 이혼하고 인물이 났다는 건 욕이잖아요. 제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한 줄 아세요? 원형탈모증에 걸릴 만큼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억지로, 억지로 웃으려고 하는데….”
나는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다.
우리가 평소 ‘진심 어린 충고’ ‘애정이 듬뿍 담긴 조언’이라고 생각하는 말들조차 받아들이는 상대에 따라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때가 있다. 지인 중에 감각과 스타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이 있다. 보기에도 매력적이고 자기 이미지 연출도 탁월해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분이다. 그런데 그 사람과는 만나기가 싫다. 나를 보기만 하면 충고의 말들을 줄줄이 쏟아내기 때문이다.
“어머, 화장이 너무 이상하다. 눈썹 그린 것 좀 봐. 짝짝이잖아. 그리고 요즘 누가 이렇게 마스카라를 진하게 해. 그냥 내추럴한 분위기를 보여줘. 살도 좀 빼지 그래. 이젠 좀 부담스럽다. 돈 벌어서 뭐해? 헬스클럽에도 다니고 골프라도 좀 배우지. 몸이나 옷에 좀 투자를 해야 세련된 커리어우먼으로 보인다고.”
일일이 옳은 지적이고 바른 말씀이다. 하지만 내 약점, 내 아킬레스건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나도 살 빼고 싶고, 화장법을 배워 화장발로 내 얼굴의 약점을 감추고 싶다. 옷도 아주 세련되게 입고 싶다.
그러나 때론 눈물겹도록 고마운 지적이나 이성적인 충고보다는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그리고 누군가 ‘조언’이라는 미명으로 내 자유를 구속하는 것도 싫다.

앞으로는 칭찬과 감사의 표시 아끼지 않을 터
나는 그동안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특히 좋고 아름다운 말보다 독설과 폭언을 더 많이 한 것 같다. 대놓고 특정인에게 독침을 쏘기도 했고 익명의 다수에게 공포의 말을 쏟아붓는 등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더군다나 방송에 나가서까지 아무 말이나 해댔으니 오죽하랴. 만약 뿌린 대로 거둬야 한다면 그 독버섯 같은 말들을 어찌 다 받아낼지 걱정스럽다. 이미 뱉어버린 나쁜 말들을 다 지워버리거나 태워버릴 수 있는 제사라도 지내고 싶은 심정이다.
새해를 맞아 내 자신과 약속했다, 혀를 자주 깨물자고. 남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지적해주고 싶은 일, 되받아쳐 박살(?)을 내고 싶은 억울한 일이 있어 입이 근질근질해도 꾹 참자고.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순식간에 상대방의 가슴과 머릿속에 깊숙하게 박혀버리기 때문이다.
안좋은 말이 나오려 할 때마다 경보가 울리거나 혓바닥이 알알해지는 그런 장치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입방정으로 인품을 잃거나 손해보는 일, 가까운 이들과 다시는 안 보게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텐데 말이다.
앞으로는 칭찬과 감사의 말을 아끼지 말고, 듬뿍듬뿍 해야겠다. “너무 고맙습니다” “오늘 널 만나니까 너무 좋아” “어쩜 눈이 그렇게 예쁘니?” “요리솜씨가 예술이네요” “와, 이거 직접 만든 건가요? 바느질 실력이 짱이네” 등등 닭살이 돋을 만큼 칭찬하고 감사하고 축복해줘야겠다.
본의 아니게 제 말 때문에 상처 받고 속상했던 분들, 이 자리를 빌어 거듭거듭 사과드립니다. 이제 착하게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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