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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행복한 이 부녀

톱스타 박경림 아버지 박우철씨의 이웃사랑

“속으로 많이 울며 키운 우리 딸이 제 힘으로 미국 유학을 간다니 뿌듯합니다”

■ 글·이영래 기자(laely@donga.com) ■ 사진·이영래 기자, 동아일보 사진DB파트

2003. 02. 03

네모 공주 박경림의 아버지 박우철씨가 남모르게 선행을 해온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 상이용사로 제대한 그는 가난을 천형처럼 여기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 뼈아픈 과거를 잊지 않고 보훈청에 쌀과 자판기 등을 기증하는 등 남몰래 사랑을 실천해온 그의 사연, 그리고 2월말 미국 유학을 앞둔 딸에게 해주고픈 이야기.

톱스타 박경림 아버지 박우철씨의  이웃사랑

올해초, 신문 사회면에 미담 기사가 하나 등장했다. 네모 천사 박경림의 아버지 박우철씨(57)의 선행 이야기가 소개되었던 것. 박경림의 부친 박씨는 지난해 20kg짜리 쌀 22부대를 의정부 보훈지청에 기탁, 연말연시를 맞아 관내 보훈가족 6가구를 비롯해 장애인과 치매노인을 돌보고 있는 복지시설 ‘천사의 집’에 전달했는가 하면, 2001년 11월 의정부 보훈지청 신청사 준공 당시에는 음료자동판매기를 기증하는 등 남모르게 이웃을 돌보아왔다고 한다.
“남몰래 해야 할 선행이 알려져 부끄럽다”며 거듭 인터뷰를 고사하는 박우철씨를 만나기 위해 그가 ‘수위 아저씨’로 재직중인 선일여중고를 예고없이 찾았다.
“크게 한 것도 없고, 별 뜻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에요. 사실 제가 국가유공자입니다. 해병대로 월남에 갔다가 팔하고 다리를 다쳐서 제대를 했어요. 67년에 가서 68년에 상이 제대를 했죠. 팔은 탄환 관통상이었고, 다리엔 파편이 박혔습니다. 어깨는 백병전 하다가 대검에 찔렸고…. 그렇게 팔, 다리를 제대로 못쓰는 몸으로 귀국 했으니 얼마나 사는 게 힘들었겠습니까? 딸 자식 덕분에 먹고 살 만해지니 아직도 고통받고 사는 사람들 생각이 나 보훈청에 찾아간 거죠.”
“어린 시절 양말도 사 신기지 못했던 불우한 환경에서도 꿋꿋이 큰 딸”
경북 김천 빈농의 아들이었던 그는 살림 밑천을 벌어오겠다며 해병대에 자원, 월남으로 파병됐다. 그러나 전장에서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베트남 퀴논 병원, 필리핀 클라크 병원을 거쳐 결국 진해 해군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그는 침상에 누운 상태로 후송되었다. 후유증에 의한 팔과 다리의 신경 마비. 이야기 도중 그는 피어물던 담배를 팔에 갖다대며 “아직도 이렇게 아픈 줄도 모른다”고 했다.
“상이 심사를 받으면 보상금을 준다고 했는데 대부분 그 말도 믿지 않았어요. 그냥 전쟁터 갔으니 다친 거야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니까. 우리 소대원 36명 중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이 예닐곱에 불과했으니 살아온 것만도 용하지 않습니까? 근데 저는 진해병원에 있었으니까 바로 심사를 받은 거죠. 일시불로 당시 돈 40만원을 주대요. 상당히 큰돈입니다. 그 돈이면 당시 여기 연신내에 길 안쪽에 있는 집 한채는 너끈히 살 수 있던 돈이었어요.”
톱스타 박경림 아버지 박우철씨의  이웃사랑

요즘도 박경림은 짬이 나면 간식을 사들고 선일여고 수위실에 들러 쉬었다 간다.


팔과 다리에 총상과 파편상, 게다가 어깨에 자상까지 입은 터라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건만, 그는 ‘그래도 나라에서 보상금을 40만원이나 줬다’며 흐믓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그렇게 받은 보상금 덕에 김천에 땅도 좀 사고, 나름대로 장사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그는 부인 이혜선씨(56)와 결혼했다. ‘장애를 숨기고 한 결혼’이라고 했다. 나름대로 장사 밑천도 있어 큰 걱정은 안했건만, 장애가 있는 몸으로 살아가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장사도 해보고 연탄 가게도 열어봤지만 어영부영 밑천만 까먹고 말았다. 팔, 다리 불편한 몸으로 연탄 배달은 역시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1남3녀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중 막내가 박경림이었다. 생활은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구파발에 그냥 무허가로 집을 지어 살았어요. 부엌도 없고 그냥 방하나만 덩그라니 있던 집인데 이게 78년에 헐려버린 겁니다. 제일 어렵던 시절이죠. 게다가 경림이 오빠가 미숙아로 태어났어요. 인큐베이터에서 컸는데 의료보험도 없던 시절이니 얼마나 타격이 컸겠습니까? 죽어라, 죽어라 하던 때 막내 경림이까지 생긴 겁니다. 장모가 이러다 우리 딸이 먼저 죽는다고 애를 지우겠다는 걸 뜯어말려서 낳았어요. 실랑이 끝에 낳긴 낳았는데…. 그날 야근을 하고 집에 갔더니 차가운 윗목에다 애를 눕혀놨어요. 가서 애를 안는데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있는 겁니다.”
그는 “행여 아이가 이제라도 그런 이야기를 알면 마음 상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을 잠시 끊었다. 그러다 담배를 피워물고 “그런데도 참 잘 컸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어릴 때 콩나물 50원어치 사오라고 심부름을 보내면 위에 놈들은 집앞 가게에 없으면 그냥 돌아왔어요. 근데 경림이는 어린 것이, 그때 살림이 없어서 양말도 신기지 않고 키웠는데, 한겨울에도 맨발로 시장통을 다 뒤져서 콩나물을 사왔어요. 당시야 콩나물을 30원어치도 팔고, 50원어치씩 팔던 시절이죠. 그러더니 이것이 학교 가서 반장을 해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쟁쟁한 남자애들 다 젖히고 학생 회장까지 한 겁니다.”

톱스타 박경림 아버지 박우철씨의  이웃사랑

초등학교 시절, 시골 할머니집에서.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박경림이다.


도무지 그 많은 아이들을 제대로 챙겨줄 형편이 아니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아이들은 모두 잘 자랐다. 특히 막내 박경림은 그 중에서도 특별했다. 공부도 잘했고, 무슨 일을 하건 다부지게 해냈다. 중학교 때부터 학교 앞 레코드 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 용돈까지 벌어 썼다. 그런 딸에게 특별히 뭘 해준 적은 없다. 다만 박경림의 초등학교 시절 휴가를 내서라도 학교 소풍을 따라갔던 기억들만이 남아있다.
지금 돌아보면 자식들에게 미안한 게 많다고 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96년, 박경림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한창 어학연수, 조기 유학 붐이 일던 때, 박경림의 절친한 친구가 유학길에 올랐다. 어린 나이의 경림은 “나도 유학을 보내달라”고 졸랐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IMF 시절, 실직 사실 딸에게 숨기고 수위 아저씨로 재취업
“마음이 아팠어요. 애가 다른 것도 아니고 공부하고 싶다고 하는데 시켜주지 못하니 부모 마음이 아플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 이듬해 제가 실직까지 한 겁니다. 애들에게는 말도 안했어요. 그냥 한 6개월 남짓 밖에도 안 나가고 집에만 있었습니다. 누굴 만나기도 싫더라고요. 그렇게 집에서 조용히 있는데 학교에서 수위 자리가 있다고 와보라는 겁니다. 월급이야 전 직장의 반도 안되지만 그나마 제가 국가유공자라서 바로 취업이 된 거죠.”
그는 96년 정리해고를 당했다. CBS(기독교방송) 기능직 사원이었던 그는 권고 사직 형태로 15년간 일해온 직장에 사표를 냈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은 고작 1천5백만원. 실직 이후 뭘 하기에는 도움이 안될 돈이었다. 그래도 그는 실직 상태인 것을 숨기고 6개월 남짓 보내다 지금의 직장인 선일여중고 수위로 재취업을 했다.
아버지가 실직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박경림은 당시 선일여고에 다니던 친구들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다. 당시 동명여고 3학년에 재학중이던 박경림은 방송국에서 일하고 계셔야 하는 아버지가 학교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날 밤 박경림은 아버지에게 “수위면 어떻길래 말을 안했느냐, 힘껏 사는 건데 그게 무슨 흉이라고 자식한테까지 속였느냐”며 울면서 화를 냈다.
“딸 덕에 생활 윤택해졌지만 나는 끝까지 학교 수위로 일할 것”
“실직 상태라 생활이 어려운데 경림이가 수험생이 됐으니 고시원에 들어가겠다는 겁니다. 고시원 생활도 한두푼 드는 게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하니까 어떻게 어떻게 보냈죠. 애가 혹시 스트레스 받을까봐 실직했단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나중에 수위로 일하고 있다는 말도 못했고…. 아마 그렇게 공부에 굶주린 터라 지금 유학을 가나봅니다. 아이가 원하는 공부 맘껏 할 수 있는 형편이 됐으니 저야 더 바랄 것이 없죠.”
동덕여대 방송연예과를 졸업한 박경림은 이제 꿈꾸던 미국 유학을 떠날 예정이다. 그의 꿈은 ‘한국의 오프라 윈프리(미국 최고의 여성 토크쇼 진행자)’가 되어 자신만의 토크쇼를 진행하는 것. 이번 미국행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다. 그는 방송 전반에 대한 공부와 브로드웨이 뮤지컬 등 새롭고 다양한 문화적 콘텐츠를 머리에 담아올 생각인데, 기간은 대략 2년6개월 정도로 잡고 있다.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일단 어학 연수를 받은 후 학교와 과정을 선택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 유학을 앞두고 그의 생활은 지금 더할 데 없이 바쁘다. 최근 ‘박고테(박경림 고속도로 테이프) 프로젝트’ 음반 판매 수익금 1억7천만원을 전액 난치병 어린이 돕기에 기부,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박경림은 미국 유학을 앞두고 5년 동안의 연예 활동을 총결산하는 단독 공연을 기획한 것. 1월18일 전북 전주를 시작으로 2월8일 부산까지 20여일간 전국 대도시를 순회하며 열리는 그의 단독 콘서트 타이틀은 ‘욕먹을 공연’. 그는 이 공연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계획이다.
“지금은 살 만하죠. 경림이가 번 돈이 꽤 됩니다. 지금 살고 있는 데가 경기도 능곡인데, 거기에 46평짜리 큰 아파트가 하나 있고, 경림이 제 이름으로 된 33평 아파트가 또 하나 있어요. 딸 덕분에 잘살지만 그거 믿고 유세할 생각은 없어요. 나는 내 재주껏 사는 거지. 학교에서 그만두랄 때까지 전 수위할 거예요. 그리고 조금씩 내 여력 닿는 대로 남도 조금씩 돕고 살아야죠.”
박우철씨는 학교에서 잘못하는 아이가 있어 욕을 하거나 혼내주려고 하다가도 애들이 웃으면서 “이러면 경림 언니 인기에 지장 있어요”하고 농담을 하는 통에 행동이 더욱 조심스러워진다고 한다. “딸에게 도움은 못돼도 폐는 끼치지 않고 살련다”는 그의 소박한 웃음이 추운 날씨에도 마냥 따뜻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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