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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작가의 공간 ⑧

황동규 시인 이별과 여행으로 다져진 ‘40년 창작생활’

“앞서 간 친구들과 부친을 보면서 죽음은 그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배웠습니다”

■ 글·박상건 ■ 사진: 조영철 기자

2002. 11. 10

겨울나무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삶을 노래하는 시인. 시를 통해 접한 황동규 시인의 이미지는 그랬다. 고 김현을 비롯해 여행과 문학을 함께 나눴던 친한 문우들을 잃고, 아버지 황순원 선생까지 떠나보낸 예순다섯의 그이는 정들었던 대학과의 ‘이별’을 앞두고 있다. 문단 데뷔의 스승인 미당 선생의 정신을 기리는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와의 만남.

황동규 시인 이별과 여행으로 다져진 ‘40년 창작생활’

황동규시인은 내년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다.

관악산 곳곳에 낙엽이 지고 있다. 지나간 날들을 그리워하듯 푸른 하늘에 눈빛 몇점 떨군 채 포물선을 긋는다. 서울대 인문관 2동 3층 황동규 시인의 연구실. 손때 묻은 누런 책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 서재의 이 빠진 모습이 이미 짐을 정리중임을 말해준다. 올해 나이 예순다섯. 그이는 68년부터 몸담았던 이 대학을 6개월 후면 떠난다. 그의 시 <풍장>에서 처럼 생사의 갈림길은 아닐지라도 긴 세월 정든 교정을 떠나려니 덧없는 세월은 주마등처럼 스치운다.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
일자 무식하게, 아 한문만 알았던들
부드럽게 우는 법만 알았던들,
왕 뒤에 큰 왕이 있고/큰 왕의 채찍!
마패 없이 거듭 국경을 넘는
저 보마(步馬)의 겨울 안개 아래
부챗살로 갈라지는 땅들
포(砲)들이 얼굴 망가진 아이들처럼 울어
찬 눈에 홀로 볼 비빌 것을 알았던들,
계룡산에 들어 조용히 밭에 목매었으련만.
눈이 내린다, 우리가 무심히 건너는 돌다리에
형제의 아버지가 남몰래 앓는 초가 그늘에
귀 기울여보아라, 눈이 내린다, 무심히,
갑갑하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무식하게 무식하게.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 전문

바야흐로 문청들이 중무장한 가슴으로 신춘문예를 준비하는 계절이다. 그는 신춘문예 심사를 맡고 있는 중앙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특히 시집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은 78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꾸준하게 팔리고 있는 스테디셀러. 많은 신춘문예 준비생과 대학생들이 이 시집을 찾고 있다. 장엄한 성우의 장엄한 목소리에 배경음악이 깔려 나오던 애송시 낭송 테이프의 단골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봉준이가 운다, 무식하게 무식하게…”라는 성우의 목소리가 군홧발 뒤꿈치에서 신음하던 유신시대를 지나 5공화국으로 접어들면서 눈보라 치는 겨울과 애증이 얼버무려진 시편들은 우리들 가슴을 축축이 적셔주기에 충분했다. ‘계엄령 속의 눈’ ‘비망기’ ‘전봉준’ ‘태평가’ 같은 시들이 바로 이 시집에 수록돼 있다.
미당의 추천으로 등단했던 그가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특별한 인연
황동규 시인은 38년 평남 평원군 숙천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40리 떨어진 대동군 재경초등학교 1학년 때 해방을 맞았고, 이듬해 가족과 함께 남하했다. 고교시절 마종기 시인과 친하게 어울렸고 교과서 대신 타고르 예이츠 등의 영시집에 푹 빠져 지냈다. 그러면서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대 문리대에 수석 입학했으니 수재이자 문재였던 셈. 대학 진학 때 법대나 의대 쪽보다는 문리대를 원했고 아버지는 “후회하지 않을 길이면 가라” 했다. 일제 말엽 다른 아이들처럼 히라카나를 가르쳐달라고 졸랐을 때 아버지가 울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나기> <카인의 후예>로 유명한 ‘국민작가’ 황순원 선생의 아들이다. 작년 겨울 황순원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의 올곧은 인생철학과 처신, 순수 문학정신으로 일관했던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사회장으로 치르자고 했을 때 상주인 황동규 시인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다. 평소 아버지와 비교되는 것을 꺼려했던 그이지만 겸손과 소박함으로 일관한 부친의 세세한 삶의 흐름만은 놓치지 않았던 셈이다. 부친이 타계하자 언론사의 인터뷰를 거절한 채 홀연히 백령도로 떠났던 그는 아버지의 삶과 문학혼을 짤막한 시로 남겼다. 부동산은 없고, 몇병의 술과 셔츠 하나,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장뿐이었다는, 준엄했던 그 아버지를 뛰어넘기 위해 죽어라 뛰어온 날들.
황동규 시인은 올해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대학 1학년 끝 무렵 갓 스무살에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던 그이니만큼 감회가 남다르다. 지금은 이세상에 없는 평론가 김현과 함께 미당에게 세배 다녔던 황시인. 친일 어용시비와 별개로 미당 시를 읽고 감동받은 사람들은 그 감동을 진솔하게, 실존적으로 전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작품의 진정성과 나르시시즘, 그리고 토속어와 신라정신, 그가 미당에게서 배운 것들이다.
그는 ‘시란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등단 이후 여러 변모를 거듭해온 시세계는 죽음을 노래한 ‘풍장’을 넘어 삶의 궤적을 뚫고 다시 우주와 내통한다. 예수, 석가, 원효, 니체 등 성(聖)과 인간의 속(俗)이 만나는 공간을 노래한다. 일반 독자들에게 이러한 변모는 급작스럽고 부담스러움에도 한동안 이런 시도는 계속될 것 같다. “늦가을 저녁/산들이 긴 그림자를 거두어들일 때/검불 몇 날리는 바람 속에/목소리 막 지우기 시작하는/적막한 새소리.”(미당문학상 수상작 ‘적막한 새소리’ 중에서)처럼 시원(始原)의 노래를 불러 제끼면서 말이다.

황동규 시인 이별과 여행으로 다져진 ‘40년 창작생활’

”여행은 일상의 막힌 숨통을 틔워준다”는 황동규 시인.

황동규 시인은 여행벽이 심하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왜 여행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논리적으로 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고 답했다. 운명적으로 역마살이 붙어 있는 걸까? 여행의 동행자는 시대별로 다르지만 고 김현 김정웅 김병익 서승해(미당의 장남) 김주연 홍신선 김명인 하응백 조정권 김윤배 등 대부분 문학판 친구들이다.
어릴 적 경의선의 조그만 역에서 십리쯤 더 들어가야 닿는 ‘간리(間里)’ 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홀로 험준한 월명산 너머 산골 할아버지 댁을 찾아가다가 길에서 혼쭐이 났던 기억. 산허리쯤에서 늑대가 쫓아올 때는 농부의 도움으로 화를 면했고 이름 모를 적갈색 짐승이 아무리 돌을 던져도 계속 따라올 때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내달렸다. 밤중에 아버지가 동네 청년들과 횃불을 들고 와 그를 찾아내고 크게 혼냈던 그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46년 5월 삼팔선이 채 그어지기 전, 남한으로 내려와 아버지가 교편 잡던 서울 중학교(서울고) 사택에서 살던 때도 그는 홀로 집을 벗어나 이화동, 돈암동, 청량리, 서대문 등을 헤매다니곤 했다. 본격적인 여행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라고 추억하면서 그는 “여행은 일상에 꽉 막힌 숨통을 트이게 해줘요. 요즈음엔 여행 다니던 친구들이 저보다 빨리 늙었는지 떠나길 꺼려해 저 또한 여행 횟수가 부쩍 줄었지만요”라고 말한다.
82년 가을부터 시인은 10여년간 틈만 나면 서해와 남해 전국을 떠돌았다. 사십대 중반에 자신도 모르게 죽음에 대한 충동이 일 때마다 목적지 없는 여행을 거듭했다. 여행은 그에게 삶에 대한 깨달음과 또 깨달음 뒤의 거듭남을 보게 만들어주었다. 군대시절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친구 김정강의 죽음(자살)은 그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에 더 집요하게 달라붙게 만들었다. 또한 부친상을 당하면서 그의 인생관은 조금씩 바뀌었다. 잠든 뒤에 운명한 탓에 유언도 없고 임종도 못하고 몇 시에 돌아갔는지도 몰랐던 부친의 주검 앞에서 그는 ‘허망’이라는 단어를 곱씹어야 했다.
그런 모든 경험이 응축된 것이 40대에 시작해 계속되고 있는 연작시 <풍장>이다. 풍장은 섬 지방에서 아들이 고기잡이 나갔을 때 부모가 세상을 뜨면, 매장하지 않고 아들이 돌아와 얼굴이라도 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의식. 땅에 묻지 않고 조그만 무인도에 초막을 짓고 풀로 덮었다가 나중에 땅에 묻는 것이다. 대학시절, 보길도 선유도 등지에서 행해지던 이 풍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던 그는 곧 시의 모티브로 삼았다. 82년부터 14년 동안 그렇게 70편에 이르는 ‘풍장’ 연작시를 집필하여 그는 우리 문학사에 한 획을 긋는다. 죽음을 노래하면서도 허무를 말하지 않는 그의 시세계. 폴 발레리가 ‘해변의 묘지’라는 작품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노래한 것처럼, 그는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 다오/섭섭하지 않게/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손목에 달아 놓고/아주 춥지는 않게/가죽 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군산에 가서/검색이 심하면/곰소쯤에 가서/통통배에 옮겨 실어 다오”라고 노래한다.
연작시를 쓰는 동안 친구인 김현 평론가, 황인철 변호사의 죽음을 보았기에 한동안 죽음의 침묵에 갇히기도 했다. 그러나 막스 피카르 말처럼 침묵이란, “다만 무엇인가가 결핍된 것이 아니라 어떤 적극적인 것,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에 있는 것” 아니던가. 결국 “죽음과 삶의 황홀은 한가지에서 핀 꽃… 죽지 않는 꽃은 가화(假花). 삶의 황홀이 없다면 죽음을 맞아 끝나는 삶, 그 삶의 끝남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라는 화두를 던지며 침묵을 깼다.

1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즐거운 편지’ 전문)

그의 시 중 독자에게 가장 사랑받는 시를 고르라면 단연 이 ‘즐거운 편지’를 꼽을 수 있다. 58년에 발표된 이 시는 지난 90년대말, 두편의 영화 <편지>와 <팔월의 크리마스>가 이 시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다시금 베스트셀러 순위로 진입해 두고두고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 <편지>에서 극중 여주인공 최진실이 이 ‘즐거운 편지’를 읽었다는 소식을 그는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들었다. 대체 발표된 지 40년을 훌쩍 넘은 이 시가 아직도 20대 젊은이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가 고교 3학년 때 사랑했던 연상의 여자에 대해 썼다는 이 시의 매력은 ‘사소한’ ‘진실로 진실로’라는 단어에 있다. 일상의 ‘사소한’ 일처럼 어디서 무엇을 하든 간에 너를 ‘진실로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 시를 생경하기 위해 앞 소절에 이런 ‘낯설게 하기와 가볍게 하기’라는 장치를 해놓은 게 그의 시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나 보기에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라는 ‘진달래꽃’의 정서나 “아, 님은 갔습니다. (…) 그러나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라는 ‘님의 침묵’식의 정서를 탈피한다. 사랑은 늘 만들어가는 것이지만 언젠가는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으로 믿는다”고 단정한다. 그러면서 그 사랑의 끝이 세상의 끝은 아니라며 ‘반드시’라는 단어로 강조한다. 이런 흐름을 보여주는 연애시에는 ‘조그만 사랑 노래’ ‘더 조그만 사랑 노래’ ‘비린 사랑 노래’ 등이 있다.
그는 “풍장이란 일종의 살을 버리는 행위”라 말했다. 그래서일까? “정년 퇴임하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마지막 질문에 “더 살려는 혹은 무엇에 집착하려는 생각일랑 추호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최후에는 뼈로 남을 삶의 부스러기들….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금방 눈이 내릴 것만 같다. 앙상한 나무 위에 존재의 가벼움으로 눈발이 휘날린다. 가볍게 비우고 간 사람들의 어깨 위와 가슴마다 눈발들이 사뿐히 내려앉는다. 이내 흔적도 없이 세상을 축축이 적시며 사라지는 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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