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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인물 & 화제

이혼 후 목숨 걸고 분쟁국가 돌며 다큐비디오 저널리스트로 다시 태어난 김영미

■ 글·박윤희 ■ 사진·최문갑 기자

2002. 10. 08

이혼녀라는 ‘약자’의 눈으로 전쟁국가의 어린이, 여성, 장애인 등 ‘약자’의 삶을 비디오 카메라에 담는 김영미씨는 ‘약자 전문 비디오 저널리스트’다. 그의 촬영 컨셉트는 필사즉생(必死卽生). 목숨을 내놓고 카메라를 통해 세상의 약자들과 교감하고, 그 결과물을 일본 방송국에 배급한다.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수여한 평등·인권방송 디딤돌상 수상자이기도 한 그를 만나 화약 냄새 풍기는 치열한 삶의 속내와 접속해보았다.

이혼 후 목숨 걸고 분쟁국가 돌며 다큐비디오 저널리스트로 다시 태어난 김영미
“저는 이혼하면서 이미 한번 죽었어요. 한국에서 이혼한 여성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아닌가요? 이제 제게 남은 인생은 덤이에요.”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등 전쟁이 벌어진 국가를 찾아다니며 6㎜ 디지털 카메라를 들이대는 비디오 저널리스트 김영미씨(32). 필자가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라고 묻자 그는 피우던 담배를 몇 모금 더 빨더니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눌하게 답을 한다.
키 163㎝, 몸무게 48㎏. 초등학생만큼이나 작은 손과 발. 40㎏에 달하는 카메라 장비를 들고 분쟁국가를 한번 다녀오면 체중이 평균 5㎏는 족히 빠진다는 그. 올해만 해도 그가 한국에 머문 기간은 한달이 채 안 된다. 도대체 이 작은 체구 어디에서 이렇듯 죽음을 초월하는 강렬한 에너지가 쏟아져 나오는 것일까.
KBS 일요스페셜 <탈레반 붕괴 100일, 부르카를 벗는 아프간 여인들>, SBS 특집 다큐멘터리 <동티모르의 푸른 천사>, 일본 니혼TV <루비나의 편지> 등이 그가 생명을 담보로 하고 혼자 만들어낸 다큐멘터리 작품. 그는 이 가운데 지난 2월24일 방영돼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탈레반 붕괴 100일, 부르카를 벗는 아프간 여인들>로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에서 주는 평등·인권방송 디딤돌상을 받았다.
“이혼하고부터 다시 사는 인생인데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게 찍어야죠. 저처럼 사회적 약자인 여성, 장애인, 어린이 문제에 관심이 많아요. 저는 이제 이혼 전처럼 불행해지기 싫고 행복해지고 싶은데, 혼자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행복해지고 싶어요. 디딤돌상을 받았을 때 누군가 이런 제 작업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무척 기뻤어요.”
이혼 직후 동티모르의 산악 게릴라들과 생활하며 촬영한 다큐가 첫 작품
지난해 9·11테러 사건 이후 미국의 아프간 공격이 시작되자 그는 곧바로 짐을 싸들고 아프간으로 날아갔다. 아프간에서 여성들을 카메라로 촬영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만일 촬영하다 걸리면 누군가가 총으로 쏴 죽여도 항변할 곳이 없다. 아프간 여성들은 망사 천으로 눈만 내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린 ‘부르카’란 이름의 천을 쓰고 다니는데, 아프간 여성들이 이 부르카를 벗는다는 것은 남들 앞에서 팬티를 벗는 것과 같은 의미다. 그래서 그들의 남편이나 오빠가 절대 남들 앞에 얼굴 내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아프간 여성들의 얼굴은 물론 출산 장면까지 카메라에 담았다.
“제 주관적인 생각이나 연출이 아닌 ‘사람’의 진짜 모습을 담고 싶었어요. 도대체 삶의 진실이 무엇인가 궁금했거든요. 또 세계 여성들 가운데 최고의 약자인 아프간 여성들이 전쟁중에 어떻게 자기 자식을 보호하며 살아 남는지도 카메라에 담고 싶었어요.”

이혼 후 목숨 걸고 분쟁국가 돌며 다큐비디오 저널리스트로 다시 태어난 김영미

아프카니스탄 페샤와르 난민캠프 교장선생님과 함께.

그는 아프간의 수도 카불에 도착해서 처음 1주일 동안은 카메라를 꺼낼 생각도 못했다. 우선 말이 통하지 않았고, 그곳 사람들이 카메라 삼각대를 ‘박격포’로 연상해 어려움이 많았다. 게다가 아프간 난민촌 어린이들이 그를 원숭이 보듯 쫓아다니며 괴성을 지르고 돌멩이를 던지는 통에 꼼짝없이 돌 세례를 당하는 일도 속출했다.
“아프간의 트럭은 우리나라 2층 건물만큼이나 높은데 한번은 트럭을 타고 아프간 국경을 넘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질 뻔한 적이 있었어요. 그순간 ‘드디어 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지나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더군요. 또 기온이 섭씨 56도나 되는 날은 촬영하다가 탈진해서 쓰러지기도 했어요. 병원에 실려간 후 의식이 돌아왔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시설이 허름한 시골 여인숙보다도 못 하더군요. 긴 나무 막대기를 땅에 꽂아 펜치로 링거병을 고정시켜놓고 제 팔에 반창고 대신 공업용 테이프를 붙여놓았는데 비몽사몽 중에도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그런가 하면 영하 10도의 추운 날 얼음장처럼 차가운 흙바닥에서도 잠을 청한 일도 있다.
“불씨 하나 없는 바닥에서 몸은 얼어붙기 시작하고 천장에는 쥐가 왔다갔다하는데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나’ 서글픈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흙벽돌 사이에 난 구멍으로 별이 보였는데 너무나 아름다웠죠. ‘이 세상에서 저 별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여기까지 왔으니까 저렇게 예쁜 별도 보는 거지’ 하면서 위안을 삼았어요.”
그가 이렇게 목숨을 내걸고 아프간 여성들을 만나면서 과연 어떤 진실을 캐냈는지 궁금하다.
“전쟁의 극한 상황 속에서 열일곱살 소녀가 여성들의 비밀학교를 조직하고, 또 여의사가 제왕절개로 태어난 신생아에게 호흡곤란이 오자 아기 입에 거즈를 대고 인공 호흡하는 헌신적인 모습을 제 눈으로 봤어요. 그러면서 여성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는 사실, 극한적 상황에서도 살아 있는 능동성을 가진 존재라는 진실을 포착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다큐멘터리를 찍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치유되는 소중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혼 후 인생의 대열에서 낙오자가 되었다는 패배감 때문에 몹시 괴로웠어요. 사회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느낌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아프간 여성들을 보면서 ‘넌 혼자가 아니다, 나도 혼자가 아니다. 사는 게 막막하기로 치자면 우린 같은 처지다’ 이런 생각이 들면서 서로 교감하게 되더군요. 전쟁조차도 망가뜨리지 못하는 그들의 능동성을 보면서 ‘나에게도 나만의 삶이 있구나, 살아 있어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겪는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적어도 그는 99년까진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다. 집안의 ‘가구’처럼 붙박이 된 삶이 제대로 된 인생의 교과서를 따르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사회가 여성들에게 시부모님 잘 모시고 순종적인 아내로 사는 결혼생활을 교과서로 제시하려 했다면 여성들을 아예 학교에 보내지 말았어야죠.”
그는 결혼생활 6년 만에 남들이 써놓은 교과서를 ‘분서갱유’하고 자신만의 고집과 꿈이 담긴 새로운 교과서를 쓰기 시작했다.
“이혼한 후 보증금 7백만원짜리 단칸방을 얻어 아이랑 단둘이 살았어요. 뭐랄까. 이혼한 여성의 삶은 마치 장애인과도 같은 사회적 ‘약자’더라고요. 우울증 증세도 나타났고 머릿속에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어요.”
자살의 유혹이 그의 영혼을 계속 갉아먹던 99년 어느 날, 한 신문기사를 통해 동티모르 분쟁 소식을 접하게 됐다.

교과서는 내가 직접 쓰겠다!
“여기서 이혼녀로 죽어 있으나 동티모르에서 총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무작정 사글세방 보증금을 빼서 3백만원으로 캠코더 수준의 비디오 카메라를 한대 사고 나머지 4백만원으로 여행경비를 충당했죠.”
그는 99년 8월부터 2000년 10월까지 동티모르에 머물렀다. 이때부터 비디오 저널리스트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 산 속에서 동티모르 게릴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산악 게릴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무척 순수한 사람들이었는데 그중에 20대 게릴라 한명은 태어날 때부터 게릴라였어요. 제가 산악 게릴라 아지트를 떠날 때 ‘다시 올게’ 하고 아쉬움의 인사를 전했더니 그 남자가 ‘진짜 다시 올 거야?’ 하면서 ‘꼭 다시 오라’며 수줍은 얼굴로 몇번이나 다짐하더군요.”
결국 그는 동티모르에 다시 가지 못했고 얼마전 이상한 꿈을 꾸었다.
“편집하다가 소파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 남자가 긴 머리를 하고 나타났어요. 꿈 속에서 제게 하는 말이 ‘영미야, 너 다시 온다더니 왜 안 와?’ 하고 묻더군요. 동티모르 산악 게릴라들이 즐겨 피는 담배가 있는데 그 사람들 몸에는 담배 냄새가 배어서 단내 비슷한 체취가 나요. 문득 그 체취가 나는 것 같아서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무래도 그 사람이 죽은 것 같아요. 전쟁뿐만 아니라 말라리아 때문에도 사람들이 많이 죽거든요.”
그가 동티모르에서 찍은 테이프는 70여개. <동티모르의 푸른 천사>라는 이름을 달고 SBS 방송국에서 방영됐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동티모르 등의 분쟁국가를 돌며 작업한 다큐멘터리를 편집해 국내 공중파 방송국에 파는데 50∼60분물 다큐멘터리 1편당 평균 2천만원 남짓한 제작비를 받는다. 누가 보아도 3개월 이상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에서 촬영한 다큐멘터리치고 그다지 합리적인 제작 단가는 아니다. 제작에 드는 비용을 다 빼고 나면 겨우 2백만∼3백만원 남짓한 돈만 그의 손에 쥐어지기 때문. 그렇게 적은 돈으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를 포기하기엔 그는 진실에 대한 열망이 너무 강했다. 다큐멘터리 배급 시장을 해외에서 찾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눈을 돌린 곳이 바로 현해탄 건너 일본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모 방송국을 찾아가 KBS 일요스페셜에 제 작품이 방영된 경력을 말했죠. 그랬더니 방송국 관계자가 제 작품을 보지도 않고 ‘한국에서 스페셜 했다고 해서 일본에서도 스페셜 할 거라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딱 잘라 말하더군요. 한국을 무시하는 말투에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어요. 그때부터 ‘그래? 좋아.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방송국으로부터 선택되는 삶을 거부하겠다. 앞으로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하겠다’는 오기가 발동했죠.”
일본의 공중파 방송국은 모두 8곳. 그는 원본 테이프를 들고 TV채널 순서대로 일본 방송국을 찾아다녔다. 결국 그는 니혼TV를 선택했고, 그의 작품 1분당 2백만원의 제작비를 받기로 협상을 끝냈다. 이와는 별도로 니혼TV에서는 그에게 24시간 일본어 통역을 붙여주고 일본에 머무는 기간 동안 편집실과 호텔을 제공했다.
“일본은 각 방송국에서 파견된 기자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스태프들이 거의 메뚜기떼처럼 아프가니스탄을 훑고 지나갔어요. 그래서 일본 국민들은 아프간에 대해 너무나 잘 알아요. 심지어 아프간 유물에 대한 다큐멘터리까지 제작될 정도니까요. CNN뉴스나 카피하는 우리 현실하고는 비교도 안되죠.”
그런데 왜 일본방송국에서 그에게 그처럼 파격적인 대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 사람들은 이슬람교도에 대해서 너무 잘 아니까 아프간 ‘여성’들을 아예 찍을 생각도 못 한 것이죠. 그래서 아프간에 관련된 모든 소재의 다큐멘터리가 일본에서 제작되었지만 여성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는 단 한 편도 없었어요.”
올봄 그의 다큐멘터리가 니혼TV의 전파를 처음 탔을 때도 일본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작품이 ‘조작’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프간 여성들에 대한 사진 촬영조차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식처럼 알기 때문에 감히 아프간 여성들의 출산 장면을 촬영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웠던 거죠. 제 작품의 사실성 여부를 놓고 일본에서 계속 논란이 벌어지니까 제가 니혼TV 뉴스에 직접 출연해서 제작과정을 설명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어요.”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일본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다. 그가 찍은 다큐멘터리도 화제의 대상이었지만 그가 ‘한국 여성’이라는 사실 자체가 더 큰 이야깃거리였다. 각종 신문과 잡지에 그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고, 일본 최고의 출판사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자서전 집필 제의까지 해왔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혼하고부터 한살씩 먹기 시작해서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하고 있어요. 저는 아직도 갈 길이 멀어요. 그리고 다큐멘터리는 저 혼자 찍은 것이 아니라 아프간 아줌마, 어린이들, 통역을 도와준 카불 대학 교수, 그리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모든 분들이 공동 제작한 거예요.”

그는 자신이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열혈팬’들의 ‘기도발’이라며 고마움을 감추지 못한다.
“일본의 한 할머니는 저를 위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밥상에 제 밥과 국을 떠놓으신다고 해요. 다큐 찍으러 나가서 배곯지 말라고. 또 어떤 외국 기자는 성당에서 저를 위해 기도해주고, 아프간 친구는 ‘영미가 좋은 다큐 찍으라고 알라신에게 빌어줄게’ 하고 응원해줘요. 전세계 사람들이 온갖 신에게 다 빌어줘서 그런가요? 어려운 고비도 정해진 운명처럼 잘 피해온 것 같아요.”
그의 말처럼 온갖 신들의 보살핌 때문일까. 그는 지난 8월 일본에서 또 한번의 ‘대형사고’를 쳤다. 지난 8월16일 일본 니혼TV를 통해 방영된 <뉴스 플러스 원>이 여타 7개 일본 공중파 방송을 제치고 10.8%라는 최고의 시청률을 과시한 것이다. 매일 오후 5∼7시까지 방영되는 <뉴스 플러스 원>은 니혼TV의 간판 시사뉴스프로그램. 이 프로그램 서두에 15분간 소개된 그의 다큐 작품 <루비나의 편지> 때문에 일본 열도는 또 한번의 감동과 흥분에 휩싸였다.
<루비나의 편지> 내용은 이렇다. 한 잡지에 ‘아프가니스탄 난민을 돕자’는 제목의 기사와 모금운동 광고가 실렸다. 이것을 본 일본의 여러 초등학교 어린이들은 아프간 난민캠프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학용품, 장갑, 저금통 등의 구호물자를 보냈다. 이것을 전달받은 아프간 어린이들은 무척 기뻐했다. 이 가운데 루비나(10)라는 소녀는 노란 장갑과 도날드 덕 저금통을 선물받았고, 이 선물을 전해준 일본 어린이에게 고마움을 담은 편지를 썼다. 이 편지의 주인공을 찾기 위해 일본 초등학교를 샅샅이 뒤진다. 결국 선물을 보낸 남자 어린이 두명을 찾아내고 루비나의 편지와 루비나의 난민촌 생활을 담은 비디오를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루비나를 만난 아이들 얼굴에는 호기심과 안쓰러움이 교차한다.
루비나는 두살 때 폭격으로 아버지를 잃었고 매일 끼니 걱정을 하며 가난하게 산다. 매일 새벽 엄마를 돕기 위해 커다란 물 양동이를 머리에 이고 물을 가득 실어 나르는 루비나. 이런 또래 친구의 힘겨운 모습을 교실에서 지켜본 일본 초등학생들은 이렇게 외친다.
“와아, 저 물 100㎏은 되겠다!”
“저러다가 머리 깨지는 것 아냐?”
루비나의 영상 편지에는 미국이 아프간에 투하한 폭탄이 터지는 장면 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일본 국민들에게 전쟁의 참상을 알려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런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선량한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이 자라나고 그들 가슴 속에 희망이 싹트고 있다는 진실을 전했다.
“니혼TV에서 이 다큐를 방영한 뒤, 뉴스를 진행하는 앵커가 ‘8월31일까지 아프간 어린이들에게 보내고 싶은 구호물자를 방송국으로 보내라’는 멘트를 했어요. 방송국에서는 이 구호물자를 비행기로 보내고 나서 다시 루비나의 편지 2편을 찍기로 했는데 구호물자가 너무 많이 와서 도저히 비행기 한대에 실을 수 없을 지경이 됐죠. 그래서 배로 보냈는데 11월초 아프간에 도착할 예정이래요. 그러면 다시 아프간에 가서 루비나를 만날 거예요.”
시종일관 어눌한 말투였던 그가 이 대목에선 생기를 띠며 목소리에 힘이 실린다. 늦은 밤, 서울 여의도의 한 편집실에서 <루비나의 편지>를 필자에게 보여주며 부지런히 통역을 해주는 그의 눈망울은 열정으로 가득 들어차 있다. 절벽 위에 서봤던 사람만이 절벽 위에 선 사람의 심정을 꿰뚫어본다고 했던가. 전쟁의 폐허 위에서 희망의 싹을 발견하는 그의 눈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TV모니터를 지켜보던 필자의 눈이 저절로 그의 가슴 한복판으로 옮겨졌다. 그순간 사막의 신기루처럼 그의 가슴에서 푸른 싹이 돋아나는 듯한 묘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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