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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Style 유인경의 해피토크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으로 사는 법

입력 2009.07.09 15:58:00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으로 사는 법

설종보_명옥헌배롱나무_38×45cm_아크릴



프랑스에 있는 딸과 전화 통화를 했다. 식사 전이라 내 목소리에 힘이 없었는지 딸이 물었다.
“엄마, 목소리가 왜 그래? 주변에 아주 잘된 사람 있어?”
딸의 예리한(?) 지적에 부끄러운 한편 약간 억울한 기분이 들어 주절주절 반론을 펼쳤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엄마가 뭐 남 잘되는 것 배 아파하는 사람이냐? 남들이 아픈 일을 당했을 때 얼마나 진심으로 걱정하고 위로하는데… 축하도 잘해주고. 얼마 전에도 엄마 후배가 회사 대표가 돼서 축하전화도 걸고 밥도 사줬더니 이렇게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사람이 드물다고 감격하더라. 또 하필 같은 날 친구가 상을 타고 후배가 출판기념회를 해서 꽃바구니 만들어 이곳저곳 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러니. 넌 엄마를 너무 무시하고 오해하는구나.”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는 것
그러자 딸이 키들거리며 말했다.
“아냐 엄마. 인정할 건 인정하자고. 엄마는 엄마에게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보다 엄마 친구나 주변 사람에게 대단히 축하를 해줄 일이 생겼을 때 더 맥 빠져 하잖아. 전에 엄마 친구가 승진했을 때도 그랬고, 어떤 아줌마가 엄청난 부자와 재혼했을 때도 그 소식 전하면서 ‘아유, 아무개는 복도 많지, 근데 난 이게 뭐야’ ‘내 팔자는 왜 그래’라면서 심술도 부렸잖아.”
딸은 농담이라고 마무리를 지었지만 주사를 맞은 듯 각성효과가 컸다.
난 나이가 들면서 매우 관대해지고, 특히 남의 행복에 진심으로 축하해줄 성숙함을 갖췄다고, 아니 갖춰간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반백년을 살면서 세상엔 포기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초라하면 서글퍼지고, 축하의 박수를 쳐주면서도 은근히 속이 쓰렸다.
세상이란 무대에서 주인공은커녕 조연, 혹은 엑스트라가 된 듯한 느낌이 들고 나름대로 성실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꽃다발과 열매는 엉뚱한 사람이 받느냐는 회의감도 들었다. 또 친구의 행복과 성취를 보면서 부러움이 은근한 질투로, 질투가 다시 열등감과 좌절감으로 이어져 속상했다.
난 신문사에서도 몇 년째 같은 직급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따지도 않았고 이력서를 화려하게 장식할 상을 타거나 다른 감투를 쓴 것도 없다. 여기자협회를 비롯, 몇몇 단체의 임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봉사직이지 명예직도 아니다. 그런데 내 친구는 지난 5년 사이에 세 번이나 승진을 했다. 자기 회사 사장이 자기를 인정해준다고 수시로 자랑하더니 새로 사장이 바뀌었는데도 또 승진을 했다. 상사복만 있는 게 아니라 형제들도 그를 얼마나 끔찍하게 아끼는지 모른다. 남편도 상냥하며 두 아들도 문제없이 착하게 자랐다. 내가 아무리 아파도 왼쪽 속눈썹 하나 까딱 않는 남편, 절대 날 예뻐할 리 없는 선배 등 남자복이 지지리 없는 나는 부러운 마음에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아마 전생에 헌신적인 간호사 나이팅게일이었을 거야. 전쟁으로 죽어가는 숱한 남자 장군들, 군인들을 사랑으로 돌보고 생명을 구해줘서 이렇게 오늘날 보답을 받는 거야. 아니면 숱한 남자들을 대신해 나라를 구했던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편, 오빠, 자식에 남자선배 복까지 흐드러지냔 말이다.”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으로 사는 법

설종보_안성배꽃마을_130×72cm_아크릴


스스로 사랑해야 사랑받는다
그 친구는 한참을 웃더니 “세상엔 공짜가 없다”고 했다.
“너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이 울고 토한 줄 아니? 넌 술을 못 마신다는 핑계로 회식에도 잘 참석하지 않고 특히 2차 3차는 절대 안 가잖아. 난 ‘화합’을 위해서 폭탄주도 수천 잔은 마셨고 집에 있다가도 선배들이 호출하면 나갔어. 술 마신 게 자랑은 아니지만 그런 자리에 참석해서 정보도 얻고 친화력도 보여주고 끈끈한 정도 쌓았다고. 그동안 후배들에게 사준 술값만 모아도 아파트 평수가 넓어졌을 거다. 술 마셔서 선후배 등에 업혀 들어가는 흐트러진 모습도 보이면서 그들이 나를 진정한 동료로 인정해준 면도 있어. 근데 넌 남들 눈 풀어져 있을 때 콜라 마시면서 눈 똥그랗게 뜨고 있으니 마음을 열 수 있겠어? 난 하루에 상가를 3번이나 간 적도 있어. 여자들도 이젠 네트워킹을 해야 하는데 넌 독립군이면서 뭘 그래.”
다른 직종에 근무하는 후배는 언제 봐도 표정이 밝다. 대부분 모이면 직장에 관한 불평불만을 털어놓고 상사 흉을 보기 마련인데 이 후배는 늘 ‘그 국장이 나를 정말 예뻐한다’ ‘아무개 상무는 날 끔찍하게 아낀다’ 등의 자랑을 한다. 철없는 소녀도 아니고 커리어우먼이 어쩜 그리 지독한 공주병에 걸려 있는지 신기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확신으로 즐겁게 회사생활을 한다. 어느 날 그 후배와 같은 직장에 근무하는 사람을 만나 정말 그 후배가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느냐고 물었더니 이런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 그 여인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언제나 웃는 얼굴과 상냥한 태도로 뭘 부탁해도 잘 들어주는데요. 단 한 번도 못하겠다, 그건 안 된다란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렇다고 무조건 예예만 하는 예스맨은 아니고요. 무엇보다도 누굴 만나도 자신이 그 사람을 진심으로 반가워한다는 신호를 보내는데 어떻게 불쾌한 반응을 보여요? ‘나 정말 사랑스럽죠’라고 다가오는 사람에겐 당할 재간이 없죠.”
생각해보니 난 아무 이유 없이 한 상사를 무서워하고 어려워하며 가능한 한 거리를 두려했다. 후배들도 ‘선배가 밥 먹자고 하는 것을 귀찮아할지도 몰라’ 등 혼자 생각으로 가깝게 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내가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니 상대방도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소통할 기회를 잃게 된다.
내가 이 나이에도 남의 성공과 행운을 배 아파하는 것은 옹졸하고 타인에 대한 포용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인 것 같다. 내가 날 충분히 사랑하면, 나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있었다면 금메달을 탄 남에게 축하를 하면서 내가 가진 더 빛나는 메달들을 소중히 여겼을 것이다. 내 재능이나 성격 등 나의 장점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나에게 없는 것, 나의 단점을 부각시키며 나를 들들 볶느라 스스로를 괴롭혔다. 이제부터는 아무 이유 없이 스스로를 사랑하리라. 나의 명랑함, 나의 식욕, 나의 흰머리와 뱃살까지 두루두루 사랑하겠다고 다짐하던 중 딸아이가 또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아까 내가 한 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엄마가 뭐 달관한 성인군자유? 질투도 하고 속앓이도 하는 게 인간적이지. 그래서 난 엄마를 더 사랑해. 크크크.”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주연으로 사는 법

유인경씨는…
경향신문사에서 선임기자로 일하며 인터뷰 섹션을 맡아 흥미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직장 여성에 관한 책을 준비 중인데 성공이나 행복을 위한 가이드북이 아니라 웃으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실수담이나 실패담을 담을 예정이다. 그의 홈페이지(www.soodasooda. com)에 가면 그가 쓴 칼럼과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여성동아 2009년 7월 5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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